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난 Mar 18. 2023

퇴직 신청을 철회하라고요?

하늘이시여. 저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어쩐지 면직 신청이 너무 쉬웠다.

지역교육청에 의원면직 신청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필요한 서류가 뭔지 물었을 때 어쩐지 답변이 너무 쉽게 왔다. 담당자는 내가 언제를 면직일로 생각하냐고 물었고, 나는 '최대한 빨리'라고 답했다.


면직 공문 처리하는데 최대 30일 정도 걸린다고 하여 (당시 8월 말이어서) 그러면 10.1자로 퇴직하겠다고 했다. 


교장선생님께 어렵게 말을 꺼내고 승인(?)을 받아 의원면직 신청공문을 보내고 같이 일하는 직원들에게 이야기했고, 다들 당황해하긴 했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걸 다 했기에 나는 그날부터 마음이 편안해지고 온갖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면직 신청 공문을 보내고 2주 정도 지나 지역교육청 인사담당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결격사유 조회가 끝났다고 했다.

'하아. 이제 다 끝났구나.'


면직결정 공문은 9월 말에 보내준다고 했다.

'끝났다. 정말 끝났어.'


그런데 그 아래로

.

.

.



표면상으론 무척이나 예의 있는 메시지


후임 실장 발령을 안 내준다는 이야기.

3개월간 내 자리를 공석으로 비워둬야 한다는 통보.


'업무대행지정'이라 함은 차석주무관이 행정실장 업무대행을 하면서 수당을 20여만원씩 더 받고 석 달간 독박쓰라는 것이고 '결원대체 인력채용'이라 함은 간단한 사무보조할 대체직(알바)을 채용해서 주요 업무를 차석이 맡아서 하고 보조적 업무를 대체직시켜서 꾸려나가라는 것.


그냥 두가지 경우 모두, 남아있는 차석 죽으라는 소리.


또한 그걸 나보고 검토해서 말씀해 달라는 것은 내가 이 사실을 차석주무관과 교장선생님께 얘기해서 어찌할지 협의한 후에 결과를 알려달라는 얘기.


그냥 나보고 욕먹고 죽든지 맘 불편해서 죽든지 알아서 죽으라는 소리.



바로 인사담당자에게 전화했다.


'주무관님, 이렇게 하시면 그냥 저나 차석이나 둘 중 하나는 죽으라는 얘기 아니에요?'

'실장님, 10월 1일자에 휴직자가 갑자기 몇이나 생겨서 어쩌고저쩌고~'

'아니, 주무관님. 저희는 2명이 행정실 근무하는 학교예요. 지금도 둘이서 종일 동동거리고 있는데 혼자서 이걸 어떻게 해요?'

'죄송합니다. 여기도 사정이 어쩌고저쩌고. 해보면 혼자서도 다 할 수 있고 어쩌고 저쩌고.'

'헛. 당연히 혼자 할 수야 있져. 예전에 나홀로 실장들 다 어찌어찌하면서 버텼죠. 근데 그렇다고 제가 차석 등에 칼 꽂고 퇴직해야 돼요?'

'아뇨 아뇨.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실장님은 그만두시는 거니까 그냥 뒤돌아보지 마시고 맘 편히 가셔야죠.'

'아니. 이게 맘이 편할 수 있냐고요. 그리고 그러려면 저한테 이걸 말씀하실게 아니라 우리 학교 다른 사람한테 말씀하셔야지, 제가 이걸 어떻게 전하고 어떻게 협의를 합니까.'

'죄송합니다. 교육청도 사정이...'

'아.. 정말 너무하시네요.. ㅜㅜ 마지막까지 정말 너무하세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차석주무관에게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는데.. 혼자 할 수 있겠냐고.

순간 당황하여 마구 흔들리는 그의 눈빛을 내가 내 두 눈으로 지켜보면서 이런 말을 해야 하다니 ㅠ


지독하다. 이놈의 교육청. 이 배려 없는 인간들아.


교장선생님 앞에 가서 나는 또 죄인이 됐다.


"교장선생님.... 저,, 10월에 면직할 수 있다고 교육청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근데... 후임 발령을 안 내준다고 해요...;;;"

"뭐? 그게 무슨 말이야? 후임이 없다니? 그럼 학교 어떻게 하라고?"

"차석주무관님이 업무대행하든지, 계약직 뽑으라는데요...;;"

"혼자 그걸 어떻게 해. 그리고 우리 학교가 외지에 있어서 시간강사 구하기도 하늘에 별따긴데.."


나에게 화난 건 아니셨겠지만 교장선생님은 순식간에 흥분모드로 돌변하셔서 언성을 높이기 시작하셨다.


숨 막히는 찰나의 순간.

세상 제일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버린 한순간.



제가 그냥 12월 31일까지 근무할게요...

그 말이 내 입에서 나왔다. 


교장선생님의 흥분모드가 순식간에 가라앉으며 그래도 되겠냐고.

"어쩔 수 없죠...ㅠㅠ"

그러면 빨리 교육청에 전화해서 퇴직 취소한다고 하라고.


인사담당자한테 내 손으로 다시 전화를 해서 내 입으로 다시 말했다.

"주무관님, 가능하다면 제가 그냥 2023년 1월 1일로 면직일을 연기할게요..."

"아이고. 안 그러셔도 되는데. 그래주시면 너무 감사하죠. 너무 감사합니다."

"맘대로 되는 게 없네요.. 근데 그때는 후임자 없다, 발령 없다, 하면 그딴 거 상관없이 그냥 무단결근이라도 할 거예요. 저 그땐 정말 가만히 안 있어요. 저 일 크게 만들 거예요."

"아유. 네. 당연하죠. 이렇게 배려해 주셨는데 정말 1순위로 실장님 학교부터 후임 발령 꼭 내겠습니다."

"네. ㅠㅠ 그런데 교육청 정말 너무하는 거 같아요."

"근데..... 실장님, 저...."

"네? 또 왜요? ㅠㅠ"

"의원면직 신청서가 교육청으로 접수된 상태여서 실장님이 다시 면직철회 공문을 보내주셔야........"






하아.

이런 !#@$#%$#%$^&%^랴 ㅕ랴며ㅜㅐㅑㅍㅈ며ㅐㅑㅁ져대쳔야려ㅑㅇㄹ챵놔모ㅑㅕ모햐ㅏㄴ멀너팦ㄻㄴ론미초르ㅗ항혿거]-0ㅂ ㅕㅓㅔㅐ성니ㅑ홒*&$#@$@$@!$#!%(*)* rormwlqkfTkro rkxdms dlfdl





내 손으로 다시 정성껏 타이핑을 하여 공문을 보냈다.


기 제출한 의원면직 신청을 철회합니다.
-어느 6급 행정실장의 모양 빠지는 면직 철회 공문


남편한테 전화로 이 상황을 얘기하는데 눈물이 났다. 화장실에서 조금 울었다.

"여보, 이 바닥 진짜 거지같애. 너무 거지같애. 나 10년 넘게 일하고 퇴직한다는데 사람을 마지막까지 이렇게 대해 ㅠㅠ"

남편도 같이 열불 내줬다. 정말 일처리 너무 이상하다고. 무슨 공무원들이 그딴 식으로 일하냐고.


안다.

인사담당자는 잘못이 없다.

그냥 우리 조직의 구조적 문제일 뿐.

그의 말대로 내가 그냥 무시하고 나의 갈길을 갔으면 되는 거였다.

끝내는 마당에 욕먹고 싶지 않았던 나의 욕심이었을 뿐, 그냥 나는 공문이 처리된 대로 10월 1일자로 나가면 되는 거였다.


남은 사람이 알아서 하겠지.

그건 내가 신경 쓸 바가 아니야.

후임발령 안 내주면 그건 교육청이 나쁜 거지, 내 탓이 아니야.라고 끊임없이 자기 최면을 걸었지만 나는 그냥 그런 사람이다.


나 살자고 동료 혼자 석 달 동안 독박쓰라고는 못하겠다.

그냥 내가 속이 다 문드러진 김에 90일만 더 버티면 되는 거니까

그래. 그냥 내가 3개월 더 할게.

이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물론 너무 화가 나서 며칠 잠도 잘 못 자고 속도 막 뒤집어졌지만 어쨌든 나는 퇴직의사를 학교에 알렸으니 교장선생님도 나에게 특별한 것을 요구하시지 않고 현상유지만 해도 그냥 감지덕지하시는 것 같았다. 


면직을 결정하고 신청 공문을 보내고 나서는 몇 개월간 고민했던 마음이 차분해지고 평화로웠다. 그런데 또 면직철회 공문을 보내고 나니 마음이 널뛰듯 정신이 산만해지며 또다시 '퇴직하지 말라는 하늘의 계시인가.' 하면서 불편함을 한가득 입에 물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 와중에 쏟아진 '퇴직 말고 휴직하라'는 선배들의 잔소리 한 바가지.


우선 내 마음은 2023.1.1자로 퇴직하는 걸로 결정했고.

석 달간 무슨 변수가 생겨서 휴직으로 방향을 선회하는 일이 생기려나. 

지금으로는 전혀 '아니'지만 인생이 흘러가는 건 확답할 수 없으니.


하지만 부디... 깔끔하게 끝내고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퇴직 D-15에서 다시 D-107로, 멀고 멀어서 보이지도 않는 날짜로 퇴직일 변경.


남편 왈,

"군대 전역일 미뤄지면 얼마나 열받는데, 딱 그 꼴이네."

근데 남편이 약간 신난 것 같기도 하다.

내 오해인거지? 여보, 그런 거지?


뒤도 안 돌아보고 칼같이 잘라내듯 퇴직하는 멋진 뒷모습이고 싶었는데 되게 모양 빠지게 신청서 냈다가 철회했다가 꾸질꾸질하게 떠나게 될 거 같다. 내 인생 장르는 영화보다는 시트콤인가 보다. 


2022.9.15.



사진출처: UnsplashJD Designs

이전 12화 "교장선생님, 저 의원면직 하겠습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