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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난 Mar 15. 2023

"교장선생님, 저 의원면직 하겠습니다."

세상 모든 용기를 모아 모아 끌어모아서.

'이번 주에는 교육청에 면직 신청 공문을 보내야 하는데...'

'그러려면 교장선생님께 말씀드려야 하는데...'

주말 내내 했던 생각들.

남편은 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차피 그만둘 건데 뭘 그렇게 걱정해. 계속 볼 사람도 아니고."

"아니, 그게 그냥 일반 회사랑은 다르다니까."

"다를 게 뭐가 있어. 맘 편히 얘기해."

아니. 내가 뭐 일부러 불편하고 싶어서 불편한가. 

직장인이 이해하긴 힘든 코드다.

직장에서도 일개 사원이 회장님한테 혼자 가서 그만둔다고 말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해 보라고.

긴장이 안 되는지.

내 위에 팀장님, 과장님, 차장님, 부장님, 상무님 누구라도 있으면 한 단계 윗분한테 먼저 얘기하고 그분이랑 같이 그 윗분한테 가서 말하고  그러는 체계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교장선생님과의 독대 자체가 어려운 게 아니다.

어차피 매일매일 혼자 가서 뵙고 업무 얘기하는 게 내 일이니까.

다만, 학교는 학기라는 게 있고. 방학이라는 게 있고. 정기 인사라는 게 있어서.

학교 교직원(교사 포함)들은 학기말이나 정기인사철에 정년퇴직이라든지, 명예퇴직을 한다.

뭐 갑작스럽게 학기 중간에 휴직이나 퇴직하는 경우를 못 본 건 아니지만 그건 보통 사건사고가 있거나 정말 신변에 큰일이 생겼을 때였다. 나처럼 특별히 큰 사건도 없이 중간에 그만둔다는 게 사실 말하기 쉽진 않았다.

그래도 말해야 돼.

오늘은 말해야 돼.

내일까지는 공문 보내야 10월 1일 자로 퇴직할 수 있어.

애매한 날짜에 퇴직하게 되면 월급도 일할 계산해야 하고 급여 담당자한테 너무 피해를 주게 되고(퇴직 자체가 이미 피해 주는 거지만;;;) 교육청에서 그렇게 안 해준다고 하면 11월 1일로 밀릴 수도 있고...

난... 더는 못 해. 한 달 기다려야 하는 것도 죽겠는데... 안 돼 안 돼 더는 못해.

윗사람에게 결재를 받거나,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야 할 때 최적의 타임이라는 게 있다.

심리학적으로 오전이었는지 오후였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오전에는 머리 쓰는 일, 오후에는 감성적인 일이던가.. 잘 모르겠지만..)

그런 시간대가 있다고 한다. (오후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맞는지는...)

우리 교장선생님은 교장실에 잘 계시지 않아서 오전 10시~11시쯤이나 오후 2~3시쯤? 이렇게 두 번 정도 기회가 주어질 것 같았다. 오전 시간을 놓치면 오후에 갑작스럽게 회의라도 잡히거나 교장선생님이 조퇴라도 하시면 하루를 또 날리게 되고 나는 또 불편한 마음을 갖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그래. 오전 10시에 가자.

아니. 이게 뭐라고.

10시까지 머릿속이 하얬다.

뭐라고 하지. 아니 뭐라고 말할지는 정해져 있는데.

혹시 안된다고 하면 어쩌지. 화내시면 어쩌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어차피 나는 관둘 사람. 교장선생님은 이제 내가 안 볼 사람이라고 해도.

면전에서 오고 가는 말들로 상처받고 싶지 않은 소심한 방어기제라고 해야 하나.


주말 내내. 간밤에. 출근하는 차 안에서. 나 자신을 교장선생님 앞에 앉히고 죄인이 되어 말을 꺼냈다.

"교장선생님, 저 그만두려고요."

"교장선생님, 저 퇴직하려고요."

"저 의원면직하려고 합니다."


수십 번을 반복하고. 매번 교장선생님의 반응은 달랐다. 어떤 때는 화를 내고. 어떤 때는 소리를 지르고. 어떤 때는 책임감 없다고 욕을 하고. 그게 '중간 퇴직자'에 대해 내가 갖고 있던 생각이겠지. 

책임감 없는 도망자. 학교에 민폐 끼치는 사람. 욕먹어야 할 사람.



행정실 출입문과 교장실 출입문이 열 걸음밖에 안 되는데 왜 한 번에 쉽게 가기가 어려웠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중간에 멈춰 다시 돌아서서 행정실 돌아왔다가 숨 고르고 다시 나갔다가를 두 번 정도 반복한 것 같다.

(나 혼자 연극하는 줄;;;; 복도에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었다.)

정신 차려!

이게 무서우면 그냥 입 닥치고 정년 해야지....



에라 모르겠다.


똑똑.

-들어오세요.

평소처럼 업무수첩을 옆구리에 끼고 교장실에 들어선 나를 평소처럼 맞아주시는 교장선생님.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뭐야? 표정이 왜 그래? 심각한 일이야?"

"아... 네... 조금..."

"뭔데?"

".......... 저 일 그만두려고요...."

황당하셨을 거다.

너무 놀라 하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소파에 나를 앉히고 본인도 내 맞은편에 앉으셨다.

교장선생님 입장에서는 나이 어린(?), 이제 막 6급 승진해서 앞날이 창창한 행정실장의 의원면직 선언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유를 물어보셨다.

몸이 안 좋아서 그만두고 싶다고 말씀드리니 불치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그런 걸로 왜 그만두냐고. 그렇게 안 좋으면 질병휴직을 하든, 병가를 쓰고 치료를 받든 하는 게 어떠냐고 하셨다.

아니요. 저는 그냥 그만두고 싶어요.

너무 황당하다고. 너무 갑작스럽다고. 지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중병도 아닌데 그런 걸로 갑자기 공무원을 그만두는 게 당황스럽다고 하셨다.

"아니요.. 저는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몇 년 전부터 이미 하고 있었고. 계기가 없어서 그만두지 못하다가 

몸이 안 좋아서 지금 그만둬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저 아무 생각도 안 하고 그냥 제 생각만 하고 결정했어요.

이런 마음으로 학교에 있어봤자 학교에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나에게 교장선생님은 지금은 몸이 아프니까 시야가 협소해져서 그럴 수 있다고, 우선 이 시기를 조금 넘겨보고 조금 더 생각해 보고 다시 이야기하자고 하셨다.

아니요. 저 그만하고 싶어요...


지금 그만두면 분명히 후회할 거라고 하셨다. 지금은 몸도 안 좋고 아직 학교에 적응이 덜 돼서 정신이 없지만 그만두고 집에 있으면 더 우울해지고 안 좋을 거라고 하셨다. 그러니 한 번만 더 고민해 보라고.


죄송해요. 저 그냥 그만할래요..

소리 지르지 않으셨다. 화내지도 않으셨다.

나이 어린 후배 공무원의 섣부른 결정을 만류하고 싶어 하셨고 내 건강을 걱정해 주셨고 개인 신상에 관한 문제니까 본인이 어쩔 수가 없다며 내가 마지막으로 내린 결정을 받아들여주셨다. 하루 이틀 후에 번복해도 된다고까지 해주시면서...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오후에 사직서와 서약서를 써서 교육청으로 공문을 보냈다. 업무관리시스템에서 계속 새로고침을 하면서 

결재가 나길 기다렸고 결재가 나자마자 발송 버튼을 눌렀다.

이제 내 손을 떠났다.

공문은 지역교육청으로 가버렸다.


여러 관계기관에 결격사유를 조회하고 결과가 나오면 다시 학교로 면직 발령 공문을 보내주겠지.

그 시간이 한 달.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끝났다. 

큰 산을 넘었다.

이게 왜 나한테 제일 힘든 일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퇴근길에 엄마한테 전화로 면직 신청한 걸 이야기했다. 올해 말에 그만두게 될 것 같다고까지만 말했었는데 이렇게 다 결정한 건 엄마도 처음 듣는 거다.

- 엄마. 나 그만둔다고 교육청이랑 교장쌤한테 얘기했어.

- 갑자기? 언제?

- 오늘.

-........ 잘했어. 수고했어. 그동안 고생 많았어.

- 미안해. 정년까지 했으면 좋았을 텐데.

- 뭐가 미안해. 스트레스받지 말고 니 건강만 신경 쓰고 신나게 살아.

전화를 끊고 괜히 눈물이 났다.

운전하는데 비도 오고 눈앞이 뿌옜다.

하루 종일 긴장했는지 어깨가 아팠다.

그래도 마음이 홀가분했다.

나는 이 일을 하는 게 즐겁지가 않고 학교에 있는 나의 하루가 행복하지 않고 이렇게 버티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게 되었다.

잠깐 지나가는 바람이라고 생각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겪는 주기적인 퇴사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년 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든 이후로 한 번도 괜찮아지지 않았다.

정년까지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지옥이 되었다.

출근해서부터 퇴근까지 학교 행정실에 갇혀있는 나 자신이 가여웠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돈 적게 벌어도 마음 편하고 즐거운 거 하면서 살면 안 되나..

교장 비워 맞추면서 교사들과 맨날 업무 분장 가지고 싸우면서 교육행정직 고유의 일은 인정받지 못하면서 

보람 없이 이렇게 살아야 하나. 나는 이제 더는 못할 것 같은데.

12월까지 버티고 그만두는 것도 고민했었는데 그만두기로 마음먹고 나니까 그 기다리는 시간마저 고문이었다. 내가 한 달에 300만 원을 벌 수 있으면  3달이면 900만 원인데 난 그 돈 받으면서 나를 마음속 감옥에 가두고 고통받느니 그냥 안 받고 3달간 출근 안 하고 싶은데?라는 생각이 드니까 바로 마음의 결정이 되었다.

이제 한 달간 잘 마무리하고 내 14년 공직생활을 정리하면서 면직 허가 공문을 기다려야겠다.

얼마 만에 느끼는 마음의 평화인지 잘 모르겠다.

숨 쉴 때마다 목구멍에서 걸리던 돌덩어리가 쑥 내려간 듯하다.


2022.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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