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B형 간염, 40대 당뇨병, 50대 간경화 시작, 60대 간암으로 이어지는 아빠의 화려한 병력(病歷)을 오랜 시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겪은 탓에 우리 가족은 아빠의 간암을 쉽게 생각해왔다.
아빠가 워낙 아픈 티를 내지 않고, 타고난 체력 덕에 환자처럼 지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어쩌면 '외면하다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지 않을까'하는 일말의 희망 같은 것이 가족들의 마음속에 어느 정도 깔려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빠는 일 년에 몇 차례 ㅇㅅ병원에 입원해서 '색전술' 치료를 했다. 간암 부근에 있는 동맥에 긴 관을 집어넣어 항암제를 투여하여 간암 부근에만 항암제가 퍼지게 하고, 색전 물질을 이용해서 간암 부근의 혈관을 막아서 암세포가 스스로 죽게 만드는 시술이다. 시술 시간도 길지 않고, 부작용도 크지 않아 아빠는 이미 몇 년간 색전술을 받아왔었다.
이번에도 2박 3일 혹은 3박 4일 입원하여 색전술을 받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담당 교수님이 이제 더 이상 색전술을 할 수 없다고 했다. '암세포가 밖으로 나와 림프절로 옮겨와서(간암이 림프절로 전이되었다는 소리) 통증도 심해지고 여러 가지로 상황이 좋지 않아 이제 방사선 치료와 항암제 복용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그나마 방사선과 항암치료가 잘되면 8개월, 안 하면 4개월 정도 살 수 있다고 했다.
시한부 판정이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생각했다.
엄마 말로는, 아빠가 여러 번 입원하면서 얼굴을 익힌 간호사님이 얘기를 듣더니 교수님이 그리 말씀하셨으면 아직은 그래도 시간과 기회가 있는 거라고, 만약 최악의 상황이었으면 그냥 퇴원해서 정리하라고 했을 거라며 아빠의 상황이 아주 나쁜 건 아닐 수도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 했단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간호사님도 아빠가 오래 못 버틸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당시엔 그 얘기가 희망의 한줄기 빛처럼 느껴졌었다.)
엄마, 나, 여동생. 셋이 있는 단톡방에서 내가 말했다.
"미리부터 슬퍼하진 말자."
그래,라고 동생이 대답했다.
눈물이 계속 나왔지만 우선은 울지 않기로 했다. 우는 건 나중에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정신이라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6살짜리 아들이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옆에서 열심히 색종이를 접으며 이것 좀 봐달라고(엄마, 이거 좀 봐봐.) 계속 재잘거렸다.
아이 앞에서 우는 모습 보이기 싫어서 억지웃음을 지으며 과장된 밝은 목소리로 칭찬해 줬다.
"우와~ 이게 뭐야? 정말 멋지다~~!!"
아이의 해맑음은 절망 가운데 있던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아이를 재우고 밤이 깊은 시각, 나는 고추절임을 만들었다.
"매운 거 못 먹는데 웬 청양고추? 난 안 줘도 돼요. 아빠."
"우선 받아. 아빠가 텃밭에서 재배한 거니까."
"아니, 내가 매운 걸 못 먹는데두?"
입원하기 며칠 전 아빠가 떠맡기듯 주고 간 청양고추가 검은 봉지에 쌓여 냉장고 제일 아래 칸에 있었다.
고추를 하나하나 정성껏 씻고 포크로 구멍을 뚫어, 팔팔 끓은 간장을 부어주었다. 매워서 못 먹더라도... 시간을 들여 삭히고... 냉장고 안에 쟁여놓고... 아빠가 오래오래 우리 곁에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듯이 고추절임을 만들었다.
아빠는 그날로부터 100일을 못 채우고 떠났지만 우리 집 냉장고에는 아직 그날의 고추절임이 남아있다.
만든 지 4년 반이 지난 청양고추절임은 이제 하나도 맵지 않다. 혹시라도 썩지는 않을까 가끔 열어서 확인하고 한두 개만 꺼내서 오래도록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