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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이로 Oct 18. 2021

불쌍한 우리 엄마 이야기

불쌍한 우리 엄마는 1969년, 어느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정확히는 그것보다 2년 전 태어났지만 워낙 애기들이 많이 죽던 시기라 외할아버지께서 2년 늦게 출생신고를 하셔서 69년생이 되었다고 하셨다. 엄마의 어릴 적 이야기는 많이 들어본 적이 없다. 막내딸로 태어난 우리 엄마는 막내라는 타이틀에 비해 언니 오빠들에게 많이 양보만 받으며 살지는 않았던 듯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모가 살고 있는 옥천으로 올라온 것 같았다. 대학교는 가고 싶었지만 가지 못했다. 그 시대에는 여자가 대학교까지 가서 공부를 한다는 게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엄마는 백화점에서 일을 했다. 키는 작았지만 그 당시의 엄마는 늘씬하고 큰 눈이 예뻤다.


20대 중반, 당구장을 하던 이모에게 단골손님이었던 지금의 아빠를 소개받았다고 했다. 젊었던 아빠는 다리가 길고 잘 생긴 외모로 주변에 인기가 많았다. 우리 엄마와 아빠는 몇 번의 만남도 가지지 못한 채 빠르게 결혼을 결심하게 된다. 내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외가 쪽에서 내가 생긴 걸 알았을 때, 다들 지우라고 했었다. 이미 아빠의 술주정은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엄마는 날 지우지 않고 결혼 후 7개월 만에 나를 낳았다. 엄마의 나이는 고작 26살이었다. 엄마가 임신했을 때에도 아빠는 술을 먹었다. 그런 날이면 술 취한 아빠가 침대 위에 드러누워 코를 골며 잤고, 엄마는 침대 밑에 바닥에서 부푼 배를 끌어안고 잤다고 했다. 그 이후에도 아빠의 바람기와 알코올 중독 때문에 엄마는 갓난아기인 나를 업고 아빠를 찾으러 여관과 술집 등을 돌아다녔다고 했다. 추웠던 겨울날에는 나를 이불로 둘둘 말고 업고 나갔다고 했다. 나는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저리다.


내가 조금씩 자라면서 엄마는 몇 번의 임신을 했지만 몸이 약해 전부 유산을 하고 말았다. 아마 그 아이들을 다 낳았으면 나는 적어도 6명의 형제자매를 두고 있었을 것이다. 엄마는 서른 초반에 간신히 나의 동생을 낳았다. 그때쯤부터 집점점 기울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 시기를 시작으로 엄마 아빠의 직업은 자주 바뀌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나는 같이 살고 있는 친할머니의 밥을 더 많이 먹으며 자랐다.


내가 유치원도 졸업하지 못했을 나이,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엄마는 막내라 외할머니의 얼굴을 이모들보다 몇 해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외할머니를 서른 초반에 떠나보냈다. 그리고,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을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엄마가 울길래 따라 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날 새벽은 눈이 왔고, 차 안에서는 엄마의 울음소리와 아빠가 틀어놓은 성가 소리가 기억난다.


우리 엄마는 순한 사람이었다. 또 손재주는 좋지만 써먹을 줄 몰랐고, 머리는 좋지만 배운 게 없었다. 나는 점점 자라 엄마의 키를 넘어섰고 스스로 꿈을 그려갈 때쯤 나는 독립했다. 스무 살 이후부터 엄마의 얼굴은 많아야 한 달에 한 번 보는 정도였고, 길면 반년 이상 보지 못하는 게 당연하게 되었다. 우리의 통화는 먼 곳에 있는 가족이 아닌, 당장이라도 본가로 퇴근할 것처럼 무미건조했다. 멀리 있는 만큼 점점 마음도 낯설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불쌍한 우리 엄마는 결국 나의 손을 놓치고 만다. 사실 그 손은 내가 놓은 것인지, 엄마가 놓은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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