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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이로 Oct 14. 2020

엄마가 굳이 한약을 지어 보냈다

저녁을 막 먹고 그릇을 치우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택배 올 것이 없는데 무거운 박스 하나가 도착했다. 열어보니 한약이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니 몸이 안 좋아 보여 한재 지어서 보냈단다. 그제야 저번 추석 때 본가에 갔을 때 어디 아픈덴 없는지 꼬치꼬치 물어보던 게 생각났다. 돈도 없는데 어떻게 했냐니까 아빠가 일한 곳에서 돈이 좀 나와서 그걸로 지었다고 하셨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면서 왜 이런 걸 지었는지 고마움보다 당혹스러웠다. 이런 걸 왜 지었냐며 퉁명스럽게 전화를 끊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잔병치레를 많이 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단 한 번도 개근상을 받아본 적이 없을 정도로 자주 아팠다. 그래도 큰 병은 없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26살 때 내게 암이란 녀석이 다가왔다는 것을 알았다. 정확히는 암 직전 단계에서 발견이 되었다. 그러나 이미 세포 변형이 일어난 상태라 수술을 안 할 수는 없었다. 이 수술은 유산이나 조산의 위험성이 커져 미혼 여성에게는 추천하지 않는 방법이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수술 자체는 간단하지만 암을 유발하는 바이러스를 없애는 약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면역력으로만 치유할 수 있었다. 그 뒤로 나는 다이어트는 전부 그만두고 잘 먹고 잘 자는 데에 집중했다.


주기적으로 가는 추적검사는 나를 지치게 했다. 병원의 복도에서 나의 차례를 기다릴 때면 주변에는 전부 중년의 여성들 뿐이었다. 내가 가장 어렸다. 나는 코로나 이전에도 병원에 검사를 받으러 갈 때면 마스크를 쓰고 갔다. 치부가 생긴 느낌이었다. 내게 대학병원은 정말 아픈 사람들만 가는 곳인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내가 그곳의 환자였다. 그 사실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엄마에게 내게 그 병이 왔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물으니 왜 하필 나의 딸이었어야 했는지 하느님께 물었다 했다. 그래도 언제나처럼 신은 답이 없었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지만 나와 엄마는 그 이유를 전혀 몰랐다. 나의 20대 중반은 너무 아픈 일들이 많았다. 죽는 일이 쉽다면 당장이라도 그랬을 것만 같았다. 웃는 날보다 우는 날이 많았다. 어떨 때는 숨이 막히도록 울기도 하였고, 어떨 때는 심장이 너무 아파 주먹으로 가슴을 팡팡 치며 울었다.


소화가 되고 나서야 약을 꺼내 들었다. 목울대가 시큰거리며 아파왔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내가 뭐라고, 도대체 내가 뭐라고 힘들게 번 돈으로 팔팔한 큰 딸내미 한약을 지어 보내나 마음이 무거워졌다. 정작 자신은 갈라진 발꿈치에 아파하고, 매일 시달리는 두통은 진통제로 버텨가면서, 꿈적도 안 하는 두 무릎을 억지로 일으켜 매일 아침 일을 나가면서 내가 뭐라고.


요 며칠 우울함에 잠시 내가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나는 엄마의 자랑스러운 딸이다. 나는 우리 가족의 사랑스러운 장녀이다. 항상 그랬듯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내 등을 밀어주는 사람. 나는 무너지면 안 된다. 내가 주저앉으면 내 등 뒤에 서있던 우리 엄마는 나를 업어야 한다. 부모님의 땀이 담긴 이 검은 물을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마시자. 내가 그들을 업어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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