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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이로 Dec 18. 2020

생존하기 위해 우울하다

정신과 약이 다 떨어져서 출근 전 시간을 내서 병원에 들렀다. 대기실에 오면 그제야 무슨 이야기를 하면 좋을지 생각한다. 예전에 비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병원에 가기 전부터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니까. 원장님은 재즈를 좋아한다. 대기실엔 재즈풍 캐럴이 흐르고 진료실 안에는 턴테이블과 재즈 CD들이 자리 잡아있다. 나는 이 병원에 처음 온 날 '재즈를 좋아하시나 봐요.'하고 여유를 부렸다.


"코로나 때문에 참 삶이 엉망이죠. 그것 때문에 우울해지는 부분을 감안하고 요즘 어떠셨어요?"

"요즘 나쁘지 않았어요. 근데요 선생님, 이상하게 그게 더 불안해요. 나는 계속 불행하고 슬펐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그게 더 불안해요."


선생님은 내 눈을 바라보며 잠시 경청하다가 입을 열었다.


"사람은 안 좋은 기억을 더 잘 기억하는 경향이 있어요. 예를 들어서 호랑이에게 잡혀 물려갔던 기억은 평생 남아요. 호랑이를 만나면 도망가야 하니까, 살아야 하니까. 근데 곶감을 먹고 맛있었던 기억은 크게 남지 않아요. 맛있었던 기억을 못 한다고 내가 죽지는 않으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안 좋은 기억을 더 선명하고 오래 기억해요. 생존 본능인 거죠. 불안한 것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큰일이 닥쳤을 때 대비하고 싶어서 자꾸 불안해하는 거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문제는 불안해하면서 우울해지는 게 문제예요. 그러나 이건 시간이 걸리는 일이에요. 행복했던 기억들로 우울하고 불안한 일들을 덮는 거죠. 시간이 충분히 걸린다고 인정하고 점점 행복해지면 돼요. 잘못된 게 아니에요. 약은 더 추가 안 하고 이대로 가도 될 것 같아요."


그래, 내가 불안했던 이유는 '생존본능'이었다. 어떠한 큰일이 내게 닥쳤을 때 덜 상처 받기 위해,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나는 계속 불안해하며 주위를 살폈던 거다. 어느 순간 다가올 불행에 대비하기 위해서. 그러다 보니 정작 내게 다가온 평화를 누리지 못했다. 소소한 행복을 자꾸만 놓쳤다. 나는 계속 불행한 줄만 알았다. 


병원을 나온 뒤 이 이야기를 들은 나의 가까운 지인이 내게 물었다.

"넌 언제가 행복해? 행복은 물론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지만, 요즘 말이야."

대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의외로 쉽게 대답이 나왔다.

"고양이가 내 품에 안겨서 가만히 나를 바라볼 때, 쉬는 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그 시간."


내게 지인은 말했다. 지금 충분히 행복해해도 될 것 같다고. 감히 말하지만 내가 너였다면 지금 행복을 누리고 있었을 것이라고.


"지금 이직한 회사가 꽤나 괜찮잖아. 복지도 좋고, 일하는 사람들도 좋고. 스트레스도 덜 받고. 우울한 일도 딱히 없고. 그럼 지금은 충분히 행복해해도 되지 않을까?"


우울은 지금 내 옆에 가장 가까운 존재다. 그건 분명하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우울에 잠식되어 있을 순 없다. 그렇기에 충분히 시간을 들여서 행복해져야겠다 그렇게 다짐했다. 조급해하지 말아야지. 우울했던 나의 오랜 시간을 다 덮을 만큼 오랜 시간 행복해야지. 그렇게 조금씩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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