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26살, 떨리는 마음으로 산부인과에 간 더운 여름날이었다. 그 날은 반차를 쓰고 바람피운 전 남자 친구에게 이별통보를 한 날이었다. 며칠 전부터 부정출혈이 있어서 걱정된 마음으로 병원에 가긴 했지만 내 머릿속은 온통 배신감과 분노에 가득 차있었다. 그저 이로 인한 스트레스겠거니 하는 별다른 걱정도 없었다. 그러나 며칠 뒤, 결과는 CIN3이라는 생소한 단어가 담긴 문자메시지였다.
병원에 다시 내원하기까지 한참을 인터넷을 찾아보았다. 자궁경부 이형성증, 쉽게 말해 자궁경부암 직전에 세포 변형이 일어난 상태였다. 1단계부터 시작해 3단계까지 있는데 이미 나는 3단계였다. 수술이 무조건 필요한 상태였다. 수술 자체는 간단하지만 이 수술을 받고 나면 임신이 어려워지거나 조산이나 유산의 위험성이 커져 미혼 여성들에게는 잘 추천하지 않는다고 했다. 머리가 멍해졌다. 아이를 낳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보다 '암'이라는 단어가 크게 다가왔던 것 같다.
처음으로 대학병원에 간 날, 나는 지하철역 화장실에서 엉엉 울며 엄마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대학병원의 산부인과에는 내 나이 또래는 없었다. 복도부터 대기실까지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어수선하면서도 무거운 듯한 병원의 분위기에 나는 그저 멍했던 것 같다. 그렇게 수술 날짜가 잡혔다.
수술 날 엄마는 새벽부터 두 시간을 운전해서 서울로 올라오셨다. 애써 엄마와 나는 웃어 보였다. 실없는 농담도 했다. 잠깐 받는 수술이지만 아팠다. 아랫배의 근육이 수축되다 못해 사라질 것 같았다. 수술 날 맞았던 링거의 어떤 성분 때문인지 피부에 붉은 반점이 잔뜩 올라와 며칠을 고생했다. 그 날은 엄마와 삼계탕을 먹었다.
3개월에서 6개월에 한 번씩 나는 추적검사를 받으러 홀로 대학병원을 갔다. 그때는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다니지 않는 시기였으나 나는 매번 마스크를 쓰고 갔다. 혹시라도 누가 알아볼까 걱정됐던 것 같다. 이미 세포 변형이 이루어진 부분은 잘라내었으나 암을 유발하는 바이러스를 몰아내는 약은 없기에 면역력만이 유일한 약이었다. 나는 다이어트를 포기했다. 그리고 무조건 잘 먹기 시작했다.
대학병원에 다녀도 큰돈은 들지 않았다. 중증환자로 등록되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안내해주시던 간호사 분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등록을 '할' 것이냐고. 의아하게 쳐다보니 기록이 남아 나중에 결혼할 때 신경 쓰는 남성들이 있어 등록을 안 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나는 등록을 하겠다고 했다.
작년 여름, 드디어 자궁암 검사와 바이러스 검사에서 모두 정상이 나왔다. 기뻤다. 죽고 싶다고 생각한 날들도 꽤 많았는데 다 나아간다고 생각하니 기뻤다. 살고 싶었던 것 같다.
눈이 많이 오는 올해 초의 겨울, 얼마나 더 와야 하는지 물어보려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저번 검사에서 정상이 나왔네요? 이번에 마지막으로 하고 괜찮으면 이제 그만 와도 되겠어요."
나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그렇게 정상이라는 검사 결과를 ARS로 들은 그 날,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에게도 알렸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아프지 않다고, 병원에 더 이상 가지 않아도 된다고. 사실 몸보다 마음이 더 힘든 3년이었다. 매번 병원에 갈 때마다 무거워지는 발걸음과 자꾸만 움츠러들게 만드는 두려움, 진료를 위해 기다리는 긴 시간과 버스와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야만 하는 그 거리. 이제 더 이상 겪지 않아도 된다.
다행이다. 내가 행복해지고야 말겠다고 결심한 이때에 병마저 날아가버려서. 살아내고자 하는 이 마음에 짐이 덜어져서. 나는 이제 건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