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그리고 포틀랜드
네덜란드로 떠나기 전, 잠시 들를 한국행 비행기 표를 끊어두고 문득 새로운 갈증이 밀려왔다. 짧은 워킹홀리데이 기간을 마무리하며 언제 또다시 올지 모를 미대륙에서의 일탈을 꿈꿨다. 평소 재즈에 열광하는 나에게 쿠바는 언제나 버킷리스트였지만, 여행 이력이 향후 미국 입국에 제한을 줄 수 있다는 카더라에 발이 묶였다. 시간과 현실의 벽에 부딪혀 결국 캐나다 밴쿠버에서 가장 가까운 미국 북서부, 시애틀과 포틀랜드로 향하는 버스표를 끊었다.
밴쿠버의 미국 버전, 시애틀?!
4시간의 버스 여행 끝에 도착한 시애틀은 다들 말하는 것처럼 밴쿠버의 '미국 버전'같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아무래도 강과 항구가 있기 때문이겠지. 유명하다는 'Ivar's Fish Bar'의 피시앤칩스는 빅토리아의 '레드피쉬 블루피쉬'에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고, 심지어 밴쿠버 그랜빌 아일랜드에서 먹었던 피시앤칩스보다도 아쉬운 맛이었다.
하지만 뜻밖의 행운은 항상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오는 법. 휴대폰 로밍도 하지 않은 채 발길 닿는 대로 걷다 우연히 마주친 껌벽과 시애틀의 활기찬 명소들을 발견했다. 슬슬 여행의 즐거움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캐네디언 친구가 추천해 준 퍼블릭 마켓 안의 작은 이탈리안 그로서리 마켓에 들러 간단한 요깃거리를 구매하기로 했다. 다양한 품목에 당황하고 있던 차에 점원이 직접 맛과 식감을 상세히 설명하며 우리 취향에 맞는 것을 추천해 주었다. 그의 따뜻한 친절 덕분에 고른 샤퀴테리와 치즈, 비노를 부둣가에 앉아 맛보던 순간은 여행의 낭만을 가득 채워주었다. 직원분의 따뜻한 추천과 함께했던 한상 차림,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바다 풍경은 그 자체로 완벽한 힐링이었다.
재즈로 유명한 도시인만큼, 밤에는 당일 예약해 놨던 재즈바 '로열룸'을 찾았다. 게 중 가장 젊은 손님이자 유일한 아시안이었던 우리는 잠깐의 이질감을 느꼈지만, 은둔 고수로 보이는 기타리스트와 파워풀한 보컬의 공연은 나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시애틀은 기대 이상의 따뜻함과 즐거움을 선사해 준 도시였다.
정글 같은 도시, 하지만 포틀랜드의 히피스러움은 못 참지
시애틀에서의 하룻밤을 뒤로하고, 이번 여행의 진정한 목적지였던 포틀랜드로 향했다. 하지만 포틀랜드 역에 내리는 순간, 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마약 중독자들의 텐트촌이 끝없이 이어지는 험악한 풍경은 밴쿠버에서 보았던 노숙자들을 애교로 만들 정도였다. 밴쿠버가 동물원 수준의 치안이라면 포틀랜드는 그야말로 예측 불가능한 정글, 아마존 같았다. 호텔 체크인 시에도 지배인분이 해가 지기 전에 무조건 돌아오라는 경고를 해주었다. 코로나 이후 일부 마약 소지를 비범죄화하면서 많은 중독자들이 포틀랜드로 몰렸다는 악명을 듣긴 했지만 정말..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다, 하하.
그럼에도 포틀랜드가 좋았던 이유는, 그 속에 숨겨진 히피 감성의 아름다운 거리와 독특한 매력 때문이었다. 특히 나의 미각을 사로잡았던 맛집과 시각을 사로잡은 풍경은 포틀랜드에서의 시간을 잊지 못하게 만들었다.
포틀랜드 곳곳을 돌아다니는 즐거움은 자전거가 만들어 주었다. 호텔에서 빌린 자전거를 타고 미식의 여정을 이어갔다. 포틀랜드의 시그니처 '부두 도넛'은 캐나다의 팀홀튼보다 더 자극적이게 맛있었고, 나쁘지 않았던 ’스텀프타운‘의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리고 가장 기대했던 미국 남부식 브런치집 '스크린도어'에서 맛본 시그니처 메뉴 Fried chicken and waffle은 기대 이상이었으며 샐러드는 잊을 수 없을 만큼 맛있었다. 도저히 샐러드라고 가벼이 여길 수 없는 구운 야채의 식감, 발사믹과 오리엔탈 그 사이의 종 잡을 수 없는 퍼플소스의 조합은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주방에 들어가 레시피를 배워가고 싶은 맛이었다. 특히 처음 도전한 블러디메리의 쨍한 핫소스 맛이 강렬해서 잘 마시지 못하자 본인도 그럴 때면 토마토 주스를 더 많이 넣어서 마신다며 서버가 우리 앞에서 직접 다시 제조해 주었고, 그래도 마시기 힘들어하자 싱긋 웃으며 '생소한 음식엔 그럴 수 있다'며 계산에서 빼주기까지 했다. 그녀의 따뜻한 친절에 감동해 아낌없이 팁을 남겨주었다.
포틀랜드는 로컬 제품을 선호하는 지역상권을 가지고 있는 만큼 주말 마켓이 정말 잘 되어있었다.
Saturday market은 생각보다 크고 볼 것도 많아서 쭉 훑어보고 근처에 있는 주변 편집샵들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포틀랜드 주립대에서 하는 Farmers market도 가보고 싶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하지만 도시의 아름다움 뒤에는 항상 긴장이 도사렸다. 굴다리 밑을 지날 때에는 한 노숙자가 상의 안 쪽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무서운 눈빛으로 쫓아와 자전거를 들고 도망쳐야 했고, 길을 걸을 때 갑자기 소리 지르는 사람들을 피해 다녀야 했으며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는 레스토랑 가드와 노숙자가 싸우고 있어 지나가지 못하고 멈춰 있으니 다른 가드가 위험하다고 신호등 건너편까지 함께 동행해 주기도 하였다. 험난한 치안 속에서도 돌고 돌아다니며 곳곳의 포틀랜드를 누볐다. 포틀랜드는 정말 멋진 곳이지만, 해가 긴 여름에 가는 것을 추천하며, 차라리 자동차를 렌트해서 다니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위한 여정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구매한 비싸고 맛없는 샌드위치를 먹어보고 '부두 도넛'을 넉넉히 사 온 것에 감사했다. 8시간을 달려 밴쿠버에 도착했을 때, 나는 노숙자와 마약 중독자가 항상 넘치는 그랜빌 스트리트의 평범한 풍경조차도 안전하고 상쾌하게 느껴졌다. 짧고도 강렬했던 미국 여행은 '캐나다가 살기 좋은 곳이구나'라는 소박한 깨달음을 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낯선 곳에서의 미식과 새로움의 즐거움 속에서 나는 또 한 번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던 모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