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의 고독이 포르투의 인연으로 피어나기까지
2020년 3월, 책장에 쌓여가는 포르투갈 여행 가이드북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2019년부터 계획한 설렘으로 가득 채운 ‘나 홀로 포르투갈 여행’은 결국 무산되었다. 빵순이로서 '빵'의 어원을 가진 나라에서 마음껏 빵을 먹고, 와인덕후로써 포르투 와인도 만끽해 보겠다던 꿈은 갑작스럽게 확산된 코로나 팬데믹과 함께 흐지부지되었다. 다행히 비행기 표는 100% 환불받았지만, 마음속에 굳게 자리 잡은 '죽기 전에 꼭 포르투갈에 가겠다'는 다짐만은 그대로 남았다. 특히, 김민철 작가의 '모든 여행의 기록'이란 책에서 묘사한 황홀한 포르투갈의 풍경은, 언젠가 그곳에 닿고 말겠다는 새로운 목표에 불을 지폈다.
태양 아래 익어가는 나, 리스본의 고독한 자유
그렇게 4년 뒤 네덜란드 유학길에 오르면서, 나는 다시 한번 포르투갈을 향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입학하면 정신없이 바빠질 것을 알기에 신입생 환영회도 마다하고 홀로 리스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한국산 바비큐'처럼 웰던으로 익어가는 나 자신을 따갑게 느끼며, 꿈에 그리던 도시를 마주했다. 주황빛 지붕과 하얀 건물들은 기대 이상으로 아름다웠고, 공원에서 명상을 하거나 친구들과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낯선 평온을 찾았다.
나의 리스본 여행은 파스텔 드 나타(Pastel de Nata)를 찾아 떠나는 미식 기행이기도 했다. 여러 가게를 전전한 끝에,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곳은 파스텔 드 벨렝(Pastéis de Belém)이었다. 이곳은 옛날 수녀님들이 계란 흰자를 옷을 다리는 데 사용하고 남은 노른자로 ‘처음’ 파스텔 드 나타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필링 윗부분이 다른 곳보다 진하게 탄 듯 카라멜라이징 되어 노른자와 함께 어우러진 깊은 단맛을 냈고, 바삭한 페이스트리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벨렝탑을 바라보며 마셨던 리스본 전통주 진자(Ginja)는 샹그리아보다 독하지만 달콤한 체리와인 맛을 내는 식후주였고, 기념으로 받은 작은 잔은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저녁에는 경쾌하고 현대적인 파두 공연을 보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혼자라서 즐거웠고, 또 혼자라서 문득 고독했던 리스본의 시간이었다.
우연한 만남이 이끈 진짜 여행, 포르투
리스본의 고독을 뒤로하고 서둘러 포르투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포르투갈 친구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빌라 노바 드 가이아 언덕 위에서 대화를 나누다 서로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나의 진짜 포르투갈 여행이 시작되었다. 친구는 퇴근 후 매일 나의 개인 가이드가 되어주었다. 포르투 와인 투어의 명소인 Calem뮤지엄에 함께 가고, 자신에게는 헤비 하다며 즐겨 먹지는 않는다는 포르투 명물 프란세지냐(Francesinha) 맛집에도 동행해 주었다. 친구가 일하는 낮 시간 동안에는 볼량 시장(Mercado do Bõlhao)을 거닐거나, 낯선 골목 사이에서 찾은 취향 저격 샵들을 발굴하며 나만의 포르투를 완성해 갔다.
유명한 도시들보다 작은 도시들을 좋아하는 여행 취향을 가진 나는 즉흥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그곳은 코임브라였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인 코임브라 대학으로 유명한 이 도시는 현재까지도 해리포터의 호그와트 망토를 연상시키는 검은 가운을 입는 것으로 유명하다. 대학원 입학 전 코임브라 대학의 정기를 받고 오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 느꼈던 터였다. 포르투갈의 많은 전통 디저트들은 수녀원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파스텔 드 나타와 같은 이유로 계란 노른자를 쓰는 디저트가 많이 발달되어 있다. 이곳 역시 코임브라 지역의 수녀원에서 만들어진 파스텔 드 텐투갈, 파스텔 드 산타클라라, 케이자다 드 코임브라가 유명했다. 빵순이로서 천국 아닌가! 게다가 보사노바를 좋아하다 파두의 매력에까지 빠졌었던 나는, 파두의 본고장인 코임브라에서 와인과 전통적인 파두 공연을 함께 적셨다. 정말 완벽했다.
짧고 강렬했던 소도시 여행을 마치고 포르투로 돌아온 나를 친구가 반기며 하루 휴가를 냈다고 했다. 첫 만남에서 내가 와이너리 투어를 좋아하지만 로드트립이 아니고서야 대중교통으로 방문이 어려워 반쯤 포기했다고 한 걸 기억하고 본인과 함께 나의 위시리스트였던 와인 산지 알토 도우루(Alto Douro)로 떠나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덕분에 꿈에 그리던 포르투 와이너리에서 코스 요리와 와인 테이스팅을 즐기고 날씨를 만끽했다. 포르투로 돌아오는 길에 여름에만 한 철 장사를 하는 기찻길 옆 작은 매점에서 동네 주민들이 나눠주는 초콜릿을 먹으며 포르투갈의 찐 맛을 알게 되었고 그렇게 여행은 마무리되었다.
여행이 끝나도 끝나지 않는 인연
귀국 후 일주일, 친구는 약속대로 암스테르담으로 나를 찾아왔고, 우리는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해 크리스마스, 가족과 멀리 떨어져 홀로 지낼 나를 위해 따뜻한 포르투갈 가정식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대해 주었다. 4시간 동안 이어진 긴 점심 식사와 그들의 따뜻함에 보답하고자, 로컬 마트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들로 두부간장조림과 애호박 전을 애피타이저로, 갈비찜을 메인 메뉴로 대접했다. 매운 것을 못 먹는 가족들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였다. 모두 맛있게 먹어주었고, 그 감사함에 나는 낯선 땅에서 가족의 따스함을 느꼈다. 새해 전야 파티에서는 친구의 브라질 친구들과 함께 뜨거운 밤을 보내며 2025년 새로운 시작을 축하했다.
포르투갈 여행은 단지 아름다운 풍경과 맛있는 음식만을 남겨주지 않았다. 혼자 떠났던 여행에서, 나는 뜻밖의 친구를 얻었다. 우리는 올해 또다시 만날 예정이다. 누가 알았을까 이렇게 예상치 못한 곳에서도 진정한 연결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덧붙이는 글]
글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생생한 감동을 전하고 싶어 영상을 함께 첨부했는데, 아쉽게도 업로드 과정에서 화질이 깨지네요. 영상이 다소 흐릿하게 보이더라도, 여행의 분위기만은 온전히 느껴졌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