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게 다녔었지만 할 건 다했던, 즐거웠던 대학 생활
안녕하세요.
오늘이 브런치 연재 3회 차인데요.
브런치 북 연재를 계획할 때는 미리미리 글을 써 놓기로 생각하고 매주 일요일을 발행일로 정했는데요. 미리 적어 놓으려니, 마감에 대한 긴박함이 없고, 뭔가 생생한 생동감이 없어서 2화부터는 마감 당일인 일요일 오후부터 슬슬 노트북을 열고 해당 주제에 맞는 포스팅을 쓰기 시작했어요. 결국 밤 12시가 다 되어 월요일이 다 되어 갈 때 즈음 글 퇴고 과정이 끝났고, 일요일 연재가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여, 3회 차부터는 불가피하게 월요일 연재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월요일 아침 출근길에 기다려지는 재미있고 인생에 도움이 되는 유익한 글 써볼게요!!
많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주인집 딸내미였던 나
앞선 글 - 디자인 수업 적응기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 에서 언급했던 학부 시절에 나는 거의 몸이 2개여도 모자를 정도로 바쁘게 살았었다.
어릴 때 용산구 한남동에서 우리 집은 할머니의 재산으로 2층 양옥집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잘 살았다. 4남매 중 장남이었던 아빠는 김포 공항에서 일본어 통역을 하셨었고, 서울 시청 앞에 있는 호텔에서 근무했었다. 그때 우리 집에는 영창 피아노가 있었고, 요즘 '겨울 왕국' 엘사 부럽지 않은 이쁜 원피스가 옷장에 가득했고, 양식 스테이크나 돈가스 정식 먹기는 너무나 쉬운 그런 집이었다. 엄마는 겨울만 되면 광에 연탄을 꽉꽉 차게 채워 넣었고, 집에는 달러가 가득했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내가 3학년쯤 되었을 때 아빠에게 일이 생겼다. 치료 불가능한 병에 걸리셨고, 대학 병원 입/퇴원을 반복하면서 각종 보험 및 적금, 부동산들은 줄어들었고, 우리는 집을 전세로 주고, 점점 작은 집으로 이사를 다니게 되었다.
얄미운 주인집 자매
아직도 기억나는 에피소드로는, 2층집 주인집 딸내미였던 내가 이제는 남의 집 반지하에서 전세로 산 적이 있었는데, 그때 주인집에는 나와 같은 학년의 언니가 있는 자매가 살고 있었다.
우리 집을 가려면 꼭 주인집을 거쳐서 뒤로 돌아갔어야 했는데, 어느 날 하교 하고 집에 가고 있었는데, 때마침 그 집에서 문을 열고 소고기를 구워 먹고 있었나 보다. 갑자기 나를 부르더니 한 입 먹고 가라며 주던 기억이 나는데, 같은 학년 여자애가 있는데 자존심이 많이 상했던 기억이 난다.
학교에서는 나는 학년마다 반장, 부반장, 회장을 하면서 선생님들께 이쁨도 받는 모범생으로 잘 지내고 있었지만, 왠지 집에 오면 초라해졌었다. 지금은 아무 때나 마블링이 기막힌 A++ 한우는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데, 그때의 나에게 얘기하고 싶다. (토닥토닥!!! 언니가 소고기 많이 사줄게!!!)
그 외에도 그 주인집 자매의 얄미운 행동은 아주 먼 예전의 일이었지만, 좋은 기억이 1도 없는 걸 보니 어지간했나 보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없고, 기분 나쁜 기억이지만, 어쩌랴 그런 시간이었는걸....
| 미남은 유전이라며
아빠는 노래도 잘 부르셨고, 키도 큰 미남이셨으며 개그 욕심도 있으셨다. 할머니는 아빠가 미남인 게 잘생긴 할아버지를 닮아서 그런 거라고 하셨었는데 흑백 사진으로 뵈었던 할아버지 모습에서 아빠가 보였다. 그리고 유독 할머니께서 엄청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좋아하는 모습이 확연했던 게, 마치 아이돌과 함께 사진 찍고 기분 좋아하는 팬의 모습 같은...(나는 할머니 닮은 듯)
다만, 아쉬운 건 할아버지께선 나 태어나면 유모차 태워준다고 사다 놓으시고, 이름도 지어놨는데 - 다만 아들 이름이었다는 게 함정 -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할머니께서 할아버지 산소에 가실 때마다 너무 서럽게 우시는 거에 나도 같이 눈물이 났었던 기억이 있다. (할머니 사랑해요)
장신의 미녀 엄마
엄마도 그 당시 여자 키로는 굉장히 큰 171cm 인 미인이셨는데 학부모 참관 수업에서는 항상 우리 엄마가 멀리서도 보였다. 학부모 참관 수업뿐만 아니라, 어린이날 반장/부반장 엄마들이 모여서 선물 주러 오시거나, 어머니 동화 구연 시간에 오실 때마다 그 복도 너머 창문으로 엄마 얼굴은 항상 아주 잘 보여서 항상 친구들이 '야 너희 엄마 오셨어!'라고 먼저 말해주었다. 창문너머로 엄마와 눈빛으로 항상 얘기했다. 하하
그리고 나중에 엄마가 말해줬는데, 나는 할머니랑 집에 있고 엄마는 장 보러 청바지 입고 한남동 도깨비 시장- 왜 동네마다 도깨비 시장이 있는 건가 미스터리하다 - 에 가셨는데, 그때는 한남동에 있던 단국대학교 학생이 자기 이상형이라고 전화번호를 물어봤다면서 '은근' 자랑하셨다. (그래서 그런지 할머니와 고모의 시집살이가 아주 독했다....)
엄마도 지금의 나처럼 음악을 좋아했고 각종 취미 부자셨는데, 장구, 동판 그림 그리기, 서예, 노래 교실, 컴퓨터 교실, 정말 다양한 취미 생활을 하셨다.
국민학교 2학년 때였는데, 엄마가 장구 치러 간 어느 건물 옥상에서 엄마 장구 수업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집에 간 기억이 생생하다. 장구 선생님께서 앞에 앉아계시고, 뒤에 동네 아주머니들이 아주 진지하게 장구를 치셨는데, 그 소리가 가슴을 둥둥둥 울렸고, 시끄러우면서도 합이 잘 맞아서 신기한 경험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는 시집살이의 고단함을 장구로 달랬던 것 같다.
동판 그림 그리기는 동판에 못으로 선을 잡고 유화 물감을 채색하는 수업이었는데, 클레오파트라를 그린 그림은 스승의 날 선물로 선생님께 드린 기억이 있다. 내 기억 속에도 참 멋진 작품이어서 우리 집에 놓고 싶었는데 좀 아쉬웠다.
기적의 시간들
이렇게 항상 긍정적으로 활발하게, 웃음과 유머를 잃지 않으셨던 아빠와 엄마의 긍정 마인드와 재능은 그대로 나에게 영향을 주었고, 지금 나의 자아의 9할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병원을 입/퇴원하고 가계가 쪼그라들고 있던 그 와중에도 예능 프로를 보거나 명언집, 책을 보면서 즐겁게 생각하자고 했고, 아빠는 병원에서 예측한 시한 보다 기적적으로 몇 년 더 우리와 함께 해주셨다.
그러다가, 결국 고3 수능 보기 1주일 전 독서실 근처에서 사이렌이 울렸고 - 그때는 현재 이태원 근처인 보광동으로 이사한 때였는데 - 그 언덕배기에 있는 대로변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였다. 점점 가까워지는 사이렌 소리에 마음이 두둥두둥 울렸지만, 일단 공부했고, 그 소리는 아빠가 응급실로 이송되는 엠뷸런스의 소리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그렇게 아빠는 다시 응급실로 이송되셨고, 조금 안정이 되어 일반 병실로 옮겨졌으나, 우리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수능을 보러 갔고, 시간이 흐른 후 그렇게 아빠는 고 3 겨울 방학인 12월에 돌아가셨다.
따뜻한 사람들의 마음
그때 소식을 듣고 고3 담임선생님과 같은 반 친구들이 우리 집에서 했던 장례식에 참석해 주었다. 나보다 더 우는 친구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부모님은 모두 천주교 신자셨는데, 아버지께서 위독하셨을 때는 신부님께서 병원에 오셔서 기도해 주셨었고, 아버지의 임종 후에는 그때 지역구인 보광동 성당 연령회 분들께서 매일 같이 오셔서 같이 연도해 주셨고, 장례 미사와 발인 당일 천주교 묘지까지도 같이 가주셨는데 외롭고 쓸쓸했을지도 모를 장례식을 덕분에 잘 치렀고, 많이 의지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아들을 먼저 보내신 할머니는 천주교로 개종하셔서 영세도 받으셨고, 나도 대학교 입학 후 영세받고, 청년 전례부와 성가대를 하면서 봉사 활동을 아주 열심히 했었다.
우리 남매랑 같이 숨바꼭질해 주던 장난꾸러기 같은 아빠 모습, 항상 아빠 무릎에 누워서 귀를 파주시면 잠들기도 하고, 어릴 때 한남대교 지나가는데 나를 들고 한강에 빠뜨린다며 장난치던 모습, 학교 갈 때 못 가져간 준비물 들고 교문 밖에서 서성이시던 모습까지.... 철없이 장난치던 아빠였지만, 그 아픈 와중에서도 퇴원했을 때는 항상 우리를 생각하면서 가장의 역할을 하셨다. (아빠 고마워)
Leave me alone!!
하지만, 슬퍼할 겨를도 없이 장례를 치르고 이때 방문한 먼 친척들은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집안이 어렵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00 학과로 가서 공무원을 해야 하지 않겠니, 대학교는 사치이고 돈을 벌어야 하는 거 아니냐며 온갖 잔소리를 시전 했는데, 당시 18세였던 나는 - 다행히 똑 부러지게 - 꼭 들어가고 싶은 컴퓨터학과에 입학하고 싶다고 생각했고, 친척들의 진심 없는 조언들은 모두 쓰레기통에 넣어버렸다.
어떻게든 입학만 시켜주면 알아서 졸업하겠다고 굳은 결심을 엄마한테 말씀드렸고, 원래 부탁 잘 못하는 엄마는 한남동의 알(?) 부자셨던 이모할머니께 어렵게 부탁하면서 입학금을 마련해 주셨다. (엄마 최고!)
인생의 길목에서 주저하지 말자!
지금도 느끼는 건,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고 끌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 친척들의 말을 듣고, 내가 가고 싶지 않은 것을 택했다면, 정말 후회하는 삶을 살았을 거고, 그들은 그렇게 말한 것에 책임을 지지 않았을 것이다.
혹시라도 그때의 나와 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분들이 계신다면, 힘을 내기 바란다! 그리고 응원한다!
당신은 꼭 꿈을 이룰 것이다!
갓생이어야만 했던 대학 생활
그렇게 어렵게 들어간 대학교에서 나는 등록금을 받아야 했고, 그러려면 매 학기마다 과 - 한 학년에 총 3개의 반이 있었고, 한 반에는 총 40명이었다. - 에서 수석 한 명만 주는 성적 우수 장학금을 노려야 했다. 대학 생활 4년 동안 총 8학기 중 과 수석 2번, 차석 2번을 해서 다행이었으나 이것도 전액 장학금은 아니었어서 나머지는 대출 및 아르바이트를 거의 2개 이상 하면서 지냈어야 했고, 장학금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매 학기 긴장하면서 살았어야 했다.
친구들은 한참 미팅하고 새벽까지 홍대에서 클럽 순회하면서 술 마시고 담날 자체 휴강할 때, 나는 공강 시간에 학적과 알바랑, 과외 알바나 피자 가게 알바등을 했었다.
이때 너무 고생해서 그런지 직장 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대출'이란 걸 극혐 하게 되었고, 그때의 나보다 여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 지금에도 항상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이 다시 닥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느낌이 있다. 그래서 잘 쉬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할 건 다했던 대학 생활
이렇게 말하면 뭔가 너무 빡빡한 대학생활이었다고 여겨지지만, 이성적이고 계획적인 유형(ENTJ)이라 그런지, 매일매일 다이어리의 계획을 세웠고, 놀 때는 놀고, 공부할 때는 공부하자는 마인드로 모든 열심히 하는 대학 생활이었다.
고3 담임 선생님께서 조언해 주신 대로 인생의 버킷 리스트를 적은 빨강 표지의 노트가 있었는데 이 리스트도 대학 생활하면서 점점 늘어났는데, - 이때 사용한 노트는 아직도 가지고 있고, 얼마 전에는 노션으로 디지털화했다. - 대학 등록금을 허투루 낭비하지 말자는 생각이 컸고, 내가 학교에서 받을 수 있는 모든 혜택, 20대인 내가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찾아내서 내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4학년 때는 공모전이었던 '전국 대학생 대상 웹사이트 경진대회'에 참가했고, '궁중 여인들의 예복'이란 주제로 - 전체 50페이지 정도 - 되는 웹사이트를 한/영으로 만들어서 제출했고, 운 좋게 3등을 했었다. 그때 상품으로 받은 전자기기는 아직도 어딘가에 있다.
대학 생활의 로망, 그것은!!
대학 생활의 로망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OT)과 멤버십 트레이닝 (MT, 모꼬지)였는데, 너무 캠퍼스 드라마와 만화를 많이 봤던 것인가.!!! 난생처음으로 선배들이 따라주는 냉면 그릇에 소주를 마시고는 그만.... 기분은 좋은데 몸이 안 움직이는 이상한 경험을 하고 실실 웃다가 잠이 들었는데, 키가 175인 나를 여자 선배 3명이 질질 끌고 가서 술 취한 자들을 모아 놓는 방에 넣느라 힘들었다고 했다. - 나는 여대를 졸업했다 - 그 후로 나는 술과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두 번째 대학 생활의 낭만은 동아리였는데, 사실은 응원단을 하고 싶었지만, 긴장 속에 살았던 나에게 많은 리소스를 투자해야 하는 응원단은 꿈같은 일이었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다.
그래서 그런지 한참 후인 요즘에 고려대학교 응원단을 본 순간 다시금 의지는 활활 불타올랐고, 모든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학부생들은 다 외우는 응원곡을 모두 다 외워버리고, 응원 동작도 유튜브 보면서 혼자 외웠다. (아 너무 재밌고, 짜릿함!!!!)
비평은 싫다고!
결국 대학 시절 4년을 함께한 동아리는 '문학 동아리'였는데, 외향적인 성격이지만, 은근 혼자 있는 걸 즐기고, 글 쓰는 것도 좋아해서 문학 동아리에 가면 좋을 거 같았던 생각이었다.
문학 동아리에서는 서로의 작품에 대해서 비평하는 시간이 항상 있었는데, 나는 그때 너무 상처받았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쨌든, 그렇게 비평 후에는 항상 뒤풀이가 있었고, 그렇게 서로 다시 친해지는 기회가 되었었다. 동아리 회장 언니 집에 초대받아서 모두 놀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어머님께서 해 주신 수제비가 너무 맛있었던 기억이 난다.
처음 해 본 시화전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쓴 시가 있었는데, 너무 유치해서 제목만 말하겠다.
'껍질을 깨며'
하여간 저렇게 오글거리는 제목을 단 수필 같은 시(Poet)가 있었고, 축제 기간에는 시화전을 했는데, 본인의 시를 그림과 함께 이젤에 붙여서 학교 외부 전시 공간에 전시하는 행사였다. 지금의 SNS의 좋아요처럼 길 가다 보는 사람들이 맘에 드는 시가 쓰여 있는 곳에 포스트잇이나 사탕이나 작은 꽃다발을 붙여줬다.
대학 축제하면 떠오르는 주점
그래도 동아리 MT 나 주점에서 선배들이 만든 '쏘야(소시지 야채) 볶음'이랑 부침개는 진심 맛도리였는데, 사실 지금 보면 별게 없어서, 아마도 뭔가 주머니 사정이 부족한 대학생 때는 무엇이든 맛있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아직도 기억나는 게 그 당시 2살 차이 나는 오빠랑 사귀고 있었는데, 내 인생 최초의 대학교 축제였고, 우리 동아리에서 주점을 한다고 해서 오빠를 불렀는데, 처음에는 기분 좋게 마시더니, 점점 술에 고주망태가 되어서 나중에는 내가 부축도 못 할 정도로 몸도 못 가눴는데, 교문이 잠겼었는데 나는 선배들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동아리방에 두고 집에 왔었다... 남자 친구 어머님이 전화하시고, 엄마랑 같이 다시 학교로 택시로 데리러 간 다음 집으로 데려다주었고, 그게 다인 줄 알았는데, 그 이후로도 술만 마시면 질투에 눈이 멀어서 따지고 괴롭혀서, 술에 떡이 되어 정신을 못 차리는 사람은 좀 멀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기회
이렇게 열심히 살 던 나를 보시던 '컴퓨터 그래픽스(Computer Graphics) ' 교수님께서 새로운 아르바이트 자리를 주선해 주셨다. S대 컴퓨터 공학과를 졸업하신 교수님의 대학 동기 친구 회사에서 아르바이트 생을 뽑으니 한번 가보라고! 개발 관련 업무였고,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업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 솔직히 그때 뭐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하하 - Anyway, 교수님 추천으로 이력서를 지원하고, 다니게 되었는데, 확실히 학적과 아르바이트나 다른 곳에 비해서는 급여가 좋았었던 것 같다.
이제부터 나의 신입 개발자로의 커리어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