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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초승달도 그믐달도 아니다

by UX민수 ㅡ 변민수

일과 삶의 경계


이번에도 임원이 되긴 글렀다. 그 말을 가족에게 전하는 대신, 그냥 또 야근을 했다. 퇴근길, 마트 불빛에 비친 내 얼굴이 낯설었다. 매일 보던 얼굴인데도 어쩐지 오래된 초상화 같았다. 언젠가부터 ‘일하는 나’와 ‘사는 나’가 분리되어 있었다. 낮에는 역할로 살고, 밤에는 그 역할의 잔상으로 버텼다.


회의실에서는 웃는 법도, 말 끊는 법도 잊었다. 후배들은 빠르고, 나는 느렸다. ‘동안이시네요’라는 말이 예전엔 기분 좋았는데 이제는 ‘아직 버티시네요’처럼 들렸다. 나는 효율보다 느림을 믿었지만, 세상은 그 믿음을 낡음이라 불렀다.



미안함의 무게


아이들의 생일을 늦게 챙긴 게 이번이 몇 번째인지도 모르겠다. 이젠 ‘괜찮아요’ 대신 ‘됐어요’가 먼저 돌아왔다. 기쁜 척 조차 해주지 않는 자식들을 미워할 여유란 없었다. 크게 화 한 번 낸 적 없는 아내에게 진 감정의 채무가 이제는 어깨로 내려앉아 오십견으로 자리 잡은 듯하다.


병원에서는 나이 탓이라 했지만, 나는 안다. 그것은 미안함이 굳어버린 자리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나는 늘 ‘괜찮은 사람’처럼 보여야 했다. 하지만 괜찮지 않은 날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남은 잔광


일이 내 삶의 이유였는데, 이제 그 일이 나를 버티게 하지 못한다. 성과가 끝나면 허무했고, 칭찬 뒤에는 불안이 따라왔다. ‘다음’을 준비하느라 ‘지금’을 잃어버린 사람, 그게 바로 나, 어쩌면 대부분 우리 4-50대의 이야기.


그래서 이 글은, 기쁜 소식을 전하지 못한 사람들의 기록이다. 임명장 대신 사직서를 고민하고, 축하보다 위로에 익숙해진 사람들.


나는 그들에게 이 밤의 잔광을 건넨다. 달이 스스로 어둠을 택하지 않듯, 우리 역시 잠시 그늘에 머물 뿐이다. 빛은 아직, 우리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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