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리어 여정은 계획해서 계획대로 움직이는 준비된 여행처럼 여겨서는 곤란하다. 스스로 목적지를 찾아야 하고 스스로 나침반과 이동수단을 구해야 하는 험난한 과정에 가깝다. 편안한 길이라면 오히려 내게 아무것도 성장요인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냥 커리어 관광일 뿐이다.
UX라는 분야가 가진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그 넓이와 다양성이다. 이는 기회가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명확한 커리어 경로를 설정하기 어려운 한계이기도 하다. 특히 처음 UX를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도 모호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나의 목적과 전혀 상관없는 경력이 쌓이게 될까 우려하는 건 매우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나도 지금의 역할에 이르기까지 돌아가보면 처음부터 ‘이게 내가 하고 싶은 UX다’라는 확신을 갖고 시작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막연한 흥미나 기회로 인해 시작했지만, 실무를 통해 점차 내 관심과 잘 맞는 영역임을 느끼고 그에 맞춰 조금씩 커리어의 방향을 조정해 온 결과다. 나에게 맞는 일을 찾아야 한다는 목표의식 외에 사실상 계획해서 이룬 것이란 없는 셈이다.
UX라는 일은 책이나 강의를 통해 이해하는 것과 실제 회사에서 마주하는 일 사이의 간극이 큰 편이다. 아무리 교육과 이론을 잘 정리했다고 해도, 실무에서는 전혀 다른 일들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어떤 조직에서는 UX 직무로 입사했지만 거의 UI 디자인(d)만 하게 되거나, 리서치만 반복하는 역할에 국한되기도 한다.
때문에 ‘내가 진짜 하고 싶은 UX’가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면, 일단 몸을 담아보는 것이 최선이다. 마치 옷을 피팅해 보는 것과 같다. 작은 회사든, 짧은 계약직이든, 실제 일을 해보는 과정에서 스스로도 명확한 판단을 하게 된다. 명품인지 보세인지는 일단 중요한 게 아니다. 나한테 뭐가 어울리는지 스타일을 모른다면 제 아무리 명품도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만 될 뿐이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잘할 수 있고, 무엇이 나와 맞지 않는지를 구체적으로 알게 되면, 이후의 선택에서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점점 수렴되는 자신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 간극이 좁혀지는 느낌을 통해 목적지에 다다름을 느끼게 될 것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내가 원했던 UX와 거리가 멀더라도 너무 낙담하지 않아야 한다. 어떤 경험도 절대 헛되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안 맞는지를 알았다는 것도 성과다. 이제 원하는 옷으로 바꿔 입는 노력만 해내면 된다.
되돌아보면 당시에는 별 의미 없어 보이던 경험들이 나중에 UX 포트폴리오에서 예상치 못한 경쟁력을 발휘하기도 하고, 면접장에서 하나의 차별화된 스토리로 작용하기도 한다. 내가 어필하려는 프로젝트가 아닌 구석에 있는 프로젝트 때문에 헤드헌터는 나를 원할 수도 있고, 그런 접점 때문에 면접 제의를 받을 수도 있는 게 취업시장이다.
UX라는 직무는 다양한 전공과 배경,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분야다. 처음부터 완벽히 일치하는 경로를 걸을 수는 없고, 중요한 것은 일단 걸으면서 방향을 틀 수 있는 유연함이 필수인 이유다. 어디서 어떻게 얻어걸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진짜 나와 맞는 UX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게 아니라, 여러 경험을 통해 비로소 발견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력의 연속성은 무시할 수 없다. 어떤 일을 하든 결국 그것이 축적되어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연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이럴 때 가장 필요한 건 ‘기준’을 스스로 설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반드시 사용자 조사 중심의 UX 조직에서 일하고 싶다거나, 제품 기반보다는 서비스 기반 UX가 맞다고 느낀다면, 해당 조직에 맞는 경력을 선별적으로 쌓아가야 한다. 하지만 이 기준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으며, 경험을 통해 조금씩 정교해져야만 한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겠나?
목적 있는 경력을 쌓기 위해서도 우선은 경험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얘기를 꼭 전하고 싶다.
그러니 UX 분야는 그 어떤 직무보다도 시간이 필요하고, 시행착오가 많은 분야다. 나와 맞는 조직, 역할, 도메인을 찾기까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시간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꼭 인지했으면 좋겠다. 많은 멘티들이 이 분야에서 자신의 길을 찾기까지 몇 년을 헤맸고, 그 과정 속에서 오히려 나중엔 더 단단해졌다.
나는 결국 자신이 원하는 곳에 다다른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무수히 마주해 왔다. ‘이게 나와 맞지 않을지도 몰라’라는 불안을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일단 해보는 것이다. 신중함은 준비에 매몰시킨다. 오히려 저질러 보는 것이 표현이 그래서 그렇지 학습이고 성장이다. 그리고 해보면서 느낀 감정을 토대로 방향을 조정하는 유연함을 갖추는 것, 그것이 UX 경력 설계의 비밀 아닌 비밀, 핵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당신은 그렇게 안 했다면서요? 하지만 돌이켜보니 전략적 사고를 했다면 준비 기간을 단축시켰을 것이란 게 눈에 선하니, 당연히 타인에게는 전략적 준비를 하라고 권해야만 하지 않을까? 오히려 그런 전략 없이 많은 자원을 쏟으라 하는 조언이 더 안일한 멘토링은 아닐까?
일례로, 120군데 넣어봤다, 적어도 80군데는 떨어져 봐야 한다 같은 양적 우위를 마치 커리어 전리품처럼 자랑하는 경우를 보곤 하는데, 내가 그랬으니 남도 그래야 한다가 아니라 내가 그랬으니 당신은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고 말해야 옳지 않겠냐는 거다.
UX 커리어는 단선적이지 않다. 돌아가는 듯해 보여도 결국 그 경험이 나의 경로를 만들어준다. 무조건 많이, 양적 경험을 채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꼭 첫 단추부터 모든 게 완벽하게 맞아떨어져 야만 목적지에 도달하는 건 아님을 믿어야 한다. 방황의 시간도 경험이고, 그 또한 커리어의 일부다. 그러니 걱정보다는 실행을, 불안보다는 탐색을 택하기를 더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