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믿지만 동시에 뒤처지고 있다는 불안감이 고개를 들 때, 우리는 ‘지식의 늪’에 빠졌다고 느끼곤 한다. 나 역시 학부 졸업 후 진로가 명확하지 않았던 시절, 기획이라는 막연한 분야를 진지하게 고려하게 되면서 공부해야 할 것도, 채워야 할 경험도 너무 많아 막막했던 기억이 난다. 난감 그 자체였다. 게다가 조언을 해줄 이도 주변에 없었다.
그때의 난 새로운 걸 채우기 위해 이것저것 공부하고 경험하면서 방향이 잠시 흐려졌고, 경우에 따라선 현실과 맞지 않는 비현실적인 목표들도 세우기 일쑤였다. 구체적 경험과 성과가 없는 허황된 이야기로 구성된 포트폴리오를 돌려본들 결과가 좋을 리가 없었다. 물론 그때 나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조차도 어려운 시절이었으니 말해 뭣하랴.
UX라는 분야는 유독 준비를 하면 할수록 자신이 더 모자란 기분이 드는 영역이기도 하다. 사용자 경험이라는 것이 정답이 없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배워도 배워도 모르는 것만 새로 생길 뿐, 뭔가 내가 잘 준비한다는 기분이 들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방법론도 다양하고 사용하는 툴도 계속해서 변해왔다. 최근엔 AI까지 가세해 정말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는 것 자체도 매우 어려운 무대가 돼버렸다. 그 결과 ‘준비가 더 필요하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기 십상이다.
그런데 실제로 현업에 와보면 책이나 강의에서 배운 이론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은 '실행 경험'임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그제야 뭘 했어야 했는지가 눈에 선해진다. 때문에 준비가 부족하다고 느껴질수록 ‘일단 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아이러니하고 모순적인 생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준비가 된 사람이 취업을 하는 게 아니다!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더 공부하고 더 정제된 UX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것도 좋지만, 그것만으로는 근본적인 불안감을 떨쳐낼 수 없다.
현실과의 괴리를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실무 경험을 통한 자기 검증이다. 그냥 일을 해보라는 말이다. 무슨 소릴까?
UX라는 일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나와 잘 맞는지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 일을 해보는 수밖에 없다. 내 경우 석사 시절 UX 연구실에서 UX 산학 프로젝트를 1년 넘게 수행했는데, 당시엔 이 정도면 실무 감각이 어느 정도 채워졌으리라 생각했지만, 막상 기업에 입사하고 나서야 그건 큰 착각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기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실무에서 UX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흘러갔고, 그걸 마주해야 비로소 현실적인 시야를 가질 수 있었다. 실무는 전쟁터다. 학교나 학원 같은 훈련소와는 차원이 다른 무대인 것이다. 만약 지금 어떤 계획이 있다면, 그 안에 실무 경험을 해볼 기회와 시간을 꼭 포함해 보시길 강력히 권한다. 공부만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UX의 실체를 경험하게 될 것이고, 그게 지금 느끼는 부족감과 조급함을 해소해 줄 유일한 처방전이다.
계획이 무모하다고 느껴지는 건, 아직 충분한 실행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경험이 부족하면 기준이 흔들리고, 그러다 보면 더 강도 높은 계획이나 공부로 스스로를 채찍질하게 된다.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회사가 박수 쳐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다. 준비 기간은 경력이 아니다.
게다가 경험이 부족한 가운데 세운 이런 계획은 현실에 기반하지 않았기에 지속하기 어렵고, 오히려 좌절만 키울 확률도 높다. 그래서 위험하다. 늪이다. 나 역시 준비를 오래 한 끝에야 알게 된 사실이다. 오히려 일단 저지르고 나면 그 과정 속에서 내가 진짜 필요로 하는 공부가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어떤 프로젝트에서 고객 인터뷰를 해보면, 왜 리서치 방법론을 알아야 하는지 실감하게 된다. Figma 등 툴을 써보면 어떤 기능이 실제로 중요한지 유용한지 느끼게 된다. 더불어 어떻게 하면 일하는 방법도 개선이 가능하겠구나 감각도 생기게 된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 만들어지는 지식근육은 단순한 공부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이며, 그것이 결국 무모했던 계획을 ‘가능한 방향’으로 바꾸게 한다. 왜 회사가 경력직을 선호하는지를 곱씹어 봐야만 하는 대목이다.
UX라는 분야는 다학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서, 다양한 전공자들이 모이게 된다. 그만큼 처음엔 자기 정체감이 애매할 수밖에 없다. 나만 부족한 것 같고, 남들은 더 잘 아는 것 같고, 그래서 더 불안하게 만든다. 하지만 현업에 있는 현직자 역시도 처음부터 확신이 있었던 건 아니었고, 시간과 경험을 통해 점점 ‘자신만의 UX’ 경험치를 쌓고 재구성해 나아갔다는 것은 예외가 없었을 것이다. 통과의례는 가급적 뛰어넘는 것보단 나도 경험해 보는 것이 의미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지금의 나에게 가장 필요한 건 무엇이고, 어떤 행동이 현실적인지 끊임없이 질문해 보는 일이다. 그 과정 속에서 내가 세우는 계획들이 점점 현실과 맞닿게 된다는 게 핵심이다. 무모했던 계획들을 실제의 경로로 바꾸는 방법을 통해서 점점 실무자에 가까운 나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지식의 늪’에 빠졌다고 느끼는 건 그만큼 스스로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크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또한 자기 객관화가 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니 다행스러운 측면이다. 하지만 지식을 더하는 것만으로는 그 늪에서 빠져나오기 어렵다. 지식이 실험되고, 부딪히고, 검증될 수 있도록 현실에 한 발 디딜 때, 비로소 그 늪은 나를 길러주는 흙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은 완벽한 준비보다도, 불완전한 실행을 통해 불안과 조급함을 스스로 다스려가는 과정이 더 필요할 때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오히려 ‘현실적인 계획’이 보이게 될 것이다. 이게 중요하다. 많은 시간이 나를 살찌워주지 않기 때문이다. 무모했던 계획이 ‘선명한 방향’으로 바뀌는 그 경험, 나도 그렇게 뭔가를 이루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