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혈질인 사람은 급발진하는 차와 닮았다. 예측할 수 없이 튀어나가는 그 속도감은 위험하다. 승차감은 어디서 오는가? 속도의 부드러운 변화, 유연한 흐름에서 온다. 만약 출발할 때마다 급발진만을 반복하는 차가 있다면, 그 차는 결코 편안하다고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불편하다. 그래서 싫은 것이다.
다혈질인 사람에게 그 점이 불편하다고 조심스레 전했을 때, 만약 그가 이를 조용히 받아들인다면 사실 그는 그리 다혈질이 아닐 수도 있다. 살다보면 누구나 열받을 일은 언제나 있게 마련아닌가.
그러나 진짜 다혈질인 사람은 바로 그 순간, 자신을 설명하려 든다. “그치만 뒤끝 없고, 금방 풀려.” 그 말은 어쩌면, 바뀌지 않겠다는 고백처럼 들린다. 곁에 있는 사람의 불편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설득의 대상이 되고, 결국 감정의 패턴은 그대로 유지된다. 그렇게, 함께 있는 이들은 영원히 그 불편 속에 머물러야 한다.
더 큰 문제는 그다음에 있다. 다혈질인 사람의 곁에 있는 이들은 자연스레 그의 브레이크가 되어야 한다. 그의 속도와 방향을 대신 조절하고, 감정의 곡선을 예의주시하며 옆자리를 지켜야 한다. 사람의 삶이 브레이크의 역할에 치중되기 시작하면, 점점 변화에 둔감해지고 보수적으로 굳어질 수밖에 없다. 바운더리는 그렇게 조용히 서서히 조정된다. 그 속에는 강요된 조심스러움과 무언의 긴장이 깃든다. 나는 그것을, 일종의 감정적 가스라이팅이라 본다.
그래서 나는 다혈질인 사람이 몹시, 가장 불편하다. 감정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것을 터뜨릴 자유가 곧 타인을 조정하는 방식이 되어버릴 때, 그 자유는 너무 뜨겁고 무지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