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말고 박부장 데려와."
10명도 넘는 사람들 속에서 한 팀장님이 소리치셨다. 입사한 지 3달도 채 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모든 그룹사가 참여하는 Task에 참여하게 되었다. 딱 봐도 빡세보이는 Task에 안 봐도 몇 날 며칠 밤샘을 할 것 같으니 우리 팀은 신입사원을 출전시킨 것이다. 난 영문도 모른 채 바짝 긴장한 채로 Task에서 어리바리 대다 '너 말고 박 부장 데려오라는'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20명이 넘는 사람들은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숨이 턱 막혔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 더는 신입사원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 사건이 내 회사생활 최고의 흑역사라고 생각되는 이유는 내가 완전히 부정되었기 때문이다. 입사하자마자 너무도 빨리 너 아니면 다른 대체자가 얼마든지 있다는 현실도 빠르게 알 수 있었다. 회사에서 나를 부정당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하면 좋을까? 이 질문을 되새기며 손과 발을 부단히 움직였던 것 같다. 다시는 이런 치욕을 당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일을 정말 많이, 열심히 했다.
나는 요즘 다른 차원으로 '너 말고도 된다.'는 위협을 받고 있다. 신입사원 때보다 더 걱정인 게 박 부장님과 나는 경력도, 강점도 너무 명확히 다르다는 걸 알고 있어서 속상했지 걱정까지는 아니었다. 그런데 요즘 드는 위협은 속상하진 않고 그저 걱정만 많이 생길 뿐이다. 그 당시 느꼈던 대체가능성은 이제 AI앞에서 다시금 느끼고 있다. AI가 때론 나보다 나은 결과물을 도출하는 것을 보고 나라는 사람은, 회사원으로서의 나는 어떤 역할을 더 해나가야 하나 고민을 하게 되었다.
AI와 나의 역할을 고민하면서 내가 회사에서 얻었던 별명이 떠오른다. "너 말고 박 부장"이라는 소리를 안 듣기 위해 나는 정말 일을 열심히 했고, 우리 부서의 '보고서 자판기'로 불리게 되었다. 상사가 '어'라고 하면 왜 '어'가 나왔고, 어떻게 '어'가 작동되는지 보고서로 쭉쭉 뽑아냈다. 수백 개의 보고서를 쓰고, 편집하였지만 이런 나도 견디기 힘든 순간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조사 맞추기'였다. 최상위자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 늘 조사 맞추기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자사는'과 '우리 조직은', '우리는'을 갖고 한참 토론을 하였다. 영어로는 Our company면 끝날 문제 갖고 이게 맞을까 저게 맞을까 키보드를 또각거리는 나는 언제나 눈이 빠질 것 같았다. 그런데도 안 할 수 없었다. 뉘앙스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어색한 조사, 오탈자가 하나라도 발견되면 기본이 안되었다고 최상위 조직에서 반려를 하기도 했다. 하루 종일 보고서의 조사 맞추기를 하다 보면 시간도 아깝고, 내 경력에 도움이 안 돼 이 집단에서 벗어나야 할까 하는 고민도 하게 되었다.
다행히 요즘에는 AI가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오탈자 확인을 알아서 해주고 있다. 반대로 이건 절대적으로 내가 해야겠다는 부분도 있다. 바로 판단의 몫이다. 판단은 단순히 AI가 뽑아주는 결과물만으로는 할 수 없다. 회사 내의 상황, 보고자의 성향, 지금 우리 회사가 처해져 있는 맥락, 그리고 내가 여태까지 쌓아온 경험들을 종합해서 최적화된 판단을 내리는 것이 기획자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AI는 질문을 잘 던졌을 때 그에 맞는 답을 빠르고 정확하게 제시한다. 때로는 사람보다 더 잘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 여러 답변 중에서 지금 이 시점, 이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것을 선택하는 것은 결국 기획자의 역할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본다.
내가 생각할 때 더욱 중요해질 역량은 질문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지식 자체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ChatGPT도 누구나 쓸 수 있고, 도서관이나 책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큰 차이를 만든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만 도구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데, 그 의지조차 없다면 활용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기획자의 고유한 역할을 문제를 발견하고 질문을 던지며, 상황 속에서 가장 적절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라고 본다. 이것만큼은 AI에게 위임할 수 없는 영역이며, 기획자로서 내가 스스로 붙들고 노력해야 하는 경계선이다. AI는 참 똑똑한 동료이다. 그 동료가 던져주는 답 중에서 오늘 우리 팀의 밥상에 올릴 반찬을 부단히 고르는 건 내 몫이다. 그러니까 나는 셰프, AI는 식자재 도매상쯤 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