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비스기획자의 직업병 이야기
"아 너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구나"
남편은 갑자기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곧이어 물이 콸콸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고 세수를 연거푸 하는 소리가 계속 울렸다. 돌아 나온 남편은 호소하듯 내게 말했다.
"너는 늘 결론을 원하지만 사람이 말을 하면 끝까지 들어야 하는 거야."
그 순간 나는 멈칫했다. 내가 너무 회사에 치여있는 것일까? 무례한 사람이 되어버린 걸까? 누군가를 배려하고, 경청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지만 현실 속 나는 점점 바뀌어 가는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효율을 중시하는 직업 습관이 "결론만"이라는 문장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을 상처 입히고 있었다.
엄마의 환갑을 준비하던 날도 그랬다. 나는 동생에게 대뜸 말했다.
"이제 엄마 환갑을 준비해야 하니 화상 회의를 하자. 아젠다와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를 내가 보내줄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동생은 깔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베이커리를 운영하는 동생은 화상회의를 할 일이 거의 없는데, 내가 회사에서 하듯 환갑잔치를 기획하자니까 황당하기도 하고 우스웠던 모양이다. 동생은 "언니 진짜 회사원 같다."라고 말했다. 농담이었지만 묘하게 낯설게 다가왔다. 회사의 언어가 내 일상으로 스며든 순간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자주 쓰는 단어 중 하나가 '챌린지'다. 사전에서 배운 '챌린지'는 '도전'이라는 긍정적인 이미지이다. 히지만 회사에서의 챌린지는 '혼내다. 혼나다'와 가깝게 쓰이고 있었다. "나 오늘 챌린지 받았어."는 곧 "나 오늘 혼났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느 날 학부모 상담회에서 무심코 "저도 종종 아기에게 챌린지를 받죠."라고 말해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면서 속으로 말했다.
'아 나의 언어 감각이 아주 오염되고 있구나.'
'장표'라는 단어 역시 회사에서만 쓰이는 대표적인 용어이다. PPT 파일을 뜻하는데 우린 늘 '장표'라고 말하고 불린다. 어느 날 학교 후배에게 한참 PPT에 대해 설명을 하고 수정하면 좋을 것 들을 말해주었던 적이 있다. 설명을 한참 한 뒤 후배는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저... 그런데 장표가 뭐예요?"...
내가 직업인으로서 너무 오래 살아서 업계 용어를 남발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조금씩 자각하고 있다. 언어는 단순한 말버릇이 아니라 사고방식까지 바꿔놓는다는 것을. 회사식 용어를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고와 행동까지 회사식으로 기울어졌다. 그래서였을까. 엄마의 환갑 준비에서조차 효율을 발휘하던 나는 할머니의 장례식에서도 예외 없었다.
모두가 침통해 울고 있을 때 나는 기획업무 14년 내공을 발휘해 나갔다. 나는 장례식이 이토록 비즈니스적인 것인지 몰랐다. 애도하는 방식도 누군가에겐 큰 아픔과 슬픔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비즈니스였다. 그리고 비즈니스와 관련한 프로젝트들은 나에게 낯설고도 익숙했다. 효율은 슬픔마저 다스리며 울어야 할 순간에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있었다.
"삼촌은 이것을 담당해 주세요. 조카야 너는 이것을 담당해."
상차림 메뉴와 방 배치, 메시지 카드 문구, 필요한 서류 목록을 점검하면서 각자의 역할을 지정해 주었다. 어쩌면 이런 시간들이 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애도를 표현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10년 넘게 기획팀에서 근무했다. 기획이란 말은 참 어디든 붙일 수 있다. 사업기획, 전략기획, 서비스기획 등등... 그만큼 많은 업무 범위를 다루고 있었고, 늘 효율을 중시했다. 큰 그림과 세부사항을 동시에 다루어야 했던 시간들이었다. 보고서를 쓰고,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때론 의전도 했다. 모든 것을 빠짐없이 챙겨야 했다. 효율을 중요하게 생각한 집단에서 10년 동안 있어보니 직업은 결국 사람의 성격마저도 바꿔놓았다. 돈을 받는다는 것은 나의 성정을 내어주는 것이기도 했다.
효율은 나의 무기가 되었지만 동시에 인간관계의 균열을 만드는 작은 씨앗이 되기도 했다. 효율을 선택하면 마음이 멀어지고 관계를 선택하면 참을성이 부족해진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늘 그 줄다리기 속에 서있다. 직업은 나를 키워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나를 내어주기도 했다. 효율이라는 무기를 쥐는 순간 가족의 목소리를 놓쳤고, 눈물 흘려야 할 순간조차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안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생존 방식이었다는 것을. 애도란 꼭 울음으로만 표현되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울부짖고, 누군가는 조용히 정리하며 애도한다. 나는 체크리스트로 애도했고 역할 분담으로 슬픔을 나눴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유일한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효율적인 직업인으로 살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하지만 문득문득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효율적인 직업인인가 무례한 인간인가? 그 질문 앞에서 나는 늘 서성이고 고민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