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서비스기획자의 힘
육아휴직을 했을 때였다. 밥을 먹다가 남편이 툭 던졌다.
"이번에 나 해외 주재원 이야기가 나왔어."
"오 정말 잘되었네! 재미있겠다."라는 말을 하곤, 그다음 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럼 나는.... 거기 가서 뭘 하지?'
아이 낮잠을 재우고 거실에 앉아 링크드인을 켰다. 영어 공고를 쭈욱 스크롤을 멈출 수가 없었다. 서비스기획자 공고가 안보였기 때문이다. 검색창에 다시 쳤다. 화면에는 냉정하게 한 줄만 떴다."No results."
우리나라에서는 너무 익숙한 단어였는데 해외에서는 아예 그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 순간 나는 노트북을 덮으며 생각했다.
'외국에 가면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야 하냐... 내가 한 일을 외국에서는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링크드인에서 본 직무들은 모두 역할들이 아주 세부적으로 쪼개져 있었다. UX 디자이너, Product Manager, Business Analyst처럼 각자 명확한 기능을 가진 역할들. 필요한 스킬이나 기능 위주였다. 나는 어떤 서비스를 설계하는 사람이고 문제를 풀어가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정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일을 설명하려 하니 너무 모호했다. 디자인도 했다가 데이터도 보고, 정책서도 쓰고 임원들께 보고도 많이 합니다. 여러 부서 조율도 하고요. 한마디로 일이 되게 하는 건데, 막상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라고 물으면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한국의 서비스기획자는 '문서와 회의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 기술, 디자인, 정책, 프로모션 등을 넘나들며 일한다. 이런 전방위적인 스킬이 때론 강점이 되지만 때론 불안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나는 제대로 전문성을 쌓고 있는 것일까?'
해외의 직무와 비교하며 이 질문이 계속 내 마음을 흔들었다.
한국에만 서비스 기획자가 있는 이유는, 특정 기능이 아니라 전방위적으로 아우르는 역할을 수행하는 이유는 '문화'와 '문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해외의 유사 직무는 대부분 실행 중심이다. 조율이나 관리의 역할이 구분되어 있다. 반면 내가 경험한 한국의 조직은 다르다. 기획이 모든 흐름의 중심에 서 있는 구조였다. 탑다운 방식의 조직 문화로 기획자가 여러 부서의 의견을 모아 임원의 의사 결정을 받는 역할을 맡게 된다. 임원들은 짧은 임기 안에 성과를 증명해야 했고 그 속도감 속에 기획은 의견의 허브이기도 했고 방향타가 되었다.
특히 한국에서 서비스 기획자가 만드는 문서들은 단순한 기록, 종이가 아니라 합의의 언어다. 외국은 빠른 프로토타입 위주로 서비스를 오픈해서 검증한다면 내가 경험한 한국에서의 조직은 문서를 기반으로 정책, 서비스 방향 등을 합의하고 개발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문서는 이해관계자들이 모두 같은 방향을 바라보기 위해 필요하고 소통의 언어이자 합의의 근거가 되는 셈이다.
나는 회사에서 '고양이 화장실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문서의 힘을 절실히 느꼈다. 이름은 귀여웠다. '키티 케어' 프로젝트. 하지만 실제 업무는 전혀 귀엽지 않고 징그러울 정도로 일이 많았다. 사내 벤처 형태로 진행되었고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다른 부서 출신이었다. 개발자는 외부에 있었고 디자인 담당자도 달랐다. 심지어 회의 시간조차 맞추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모두 같은 목표를 향해 움직여야 했다. 이 당시 서비스 기획자의 역할은 명확했다. 바로 '하나의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었다.
프로젝트 초반엔 혼란스러웠다. 누군가는 "그냥 대충 하시고 회사 상금으로 회식이나 하시죠."라는 사람도 있었고 누군가는 "나는 이 제품이 나오면 우리 가족들에게 모두 선물로 줄 것입니다."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문서를 펼쳤다. 방향이 어지러울 때마다 문서는 특정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 우리는 여기에 있고, 우리가 가야 할 지점은 이곳이다. 그 한 줄이 모든 혼란을 잠재웠다. 문서가 우리의 지도였고 방향타였다. 사람들을 혼란스러워할 때마다 나는 그 지도를 갖고 이야기를 하며 문제를 풀었던 기억이 난다.
해외에서는 사용자 경험(UX), 비즈니스 분석(BA), 서비스 디자인 등 각 영역이 분리되어 있다. 하지만 한국은 한 부서 혹은 한 사람이 그 모든 일을 겸해서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한국의 서비스기획자는 '전문가'이자 어찌 보면 책임의 통합자라고 생각한다. 직무의 경계가 모호하지만 그 모호함 속에서 오히려 전체를 바라보는 시야가 생긴다. 그게 바로 한국의 서비스기획자가 가진 힘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