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도 놀고, 방구석에서도 놀자

백수 시기 생활 요령 | 내가 '사장'이니 조금은 너그럽게 살아보잣!

by 유즈 uze

에너지가 떨어졌다면 버킷 리스트는 나중으로

결의에 차 오이스터 카드를 꼭 쥔 손. 그러나.. 급히 떠난 여행은 생각 같지 않았다


3년 전 겨울. 퇴사를 하자마자 런던으로 떠났다. 저질체력 치고는 길다 싶은 10일간의 혼자 여행이었다. 첫 방문이었기 때문에 가야 할 곳도, 가고 싶은 곳도 많았다. 하루 종일 찬바람을 맞으며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저녁에는 뮤지컬 공연을 보고, 예약해둔 당일투어도 다녀오면서 8일을 보냈다. 공항으로 가야 하는 마지막 날을 빼고 온전히 남은 9일째에는 쇼핑을 할 계획이었으나 난 앓아누웠다. 퇴사 전후의 긴장상황에서 쌓인 피로를 풀기도 전에 바로 낯선 환경에 뛰어든 것이 화근이었나.


감기몸살도 아닌데 몸이 사정없이 덜덜 떨리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하루 종일 호텔방에서 앓으면서 이래 가지고 무사히 귀국할 수 있을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극도의 스트레스 때문에 홍콩 공항버스 통로에 길게 누워 현지인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후배 생각이 났다. 짐 싸기부터 시작해 숙소 체크아웃, 늘 만원인 튜브 탑승, 공항 체크인 등등 해내야 할 일들이 머리를 맴돌았다. 다행히 늦은 밤부터 호전되어 무사 귀국할 수 있었지만 만약 좀 더 나은 신체적, 정신적 컨디션으로 런던에 갔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생각한다.


아무래도 난 "그만 두면 뭐할 거야?"라는 주위의 질문에 뭔가 그럴듯한 대답을 보여주려고 좀 무리를 했던 것 같다.


일단은 제대로 쉬어야 한다면 '방구석 여행'도 나쁘지 않다. 퇴사 이후의 행보는 100% 나의 것이므로 하고 싶은 걸 그냥 하면 된다. 세계여행, 외국 도시 한 달 살기, 유럽 일주... 다 좋은데 모두 웬만큼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다. 특히 관광객들이 많이 몰리는 유럽의 유명 대도시들은 요새 크고 작은 사건들이 많아서 여권과 휴대폰, 현금을 움켜쥐고 경계해야 하는 상황이라 은근히 피곤하다. 기운 딸리면 일단 쉬자.


밖에 나가서 놀아라

집에 있으면 훤한 대낮에 노는 건 나밖에 없는 것 같지만 나가보면 나 같은(그러니까.. 노는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많은 사람들이 카페, 도서관, 대형서점, 공공시설 등 열린 공간에서 뭔가 하고 있다. 시험공부를 하고 있거나 책을 읽거나 휴대폰 게임도 하고 그냥 멍때리기도 한다.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 오전부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가 앉아있는 대형서점의 휴식공간도 사람이 빼곡하다. 60대쯤 되어 보이는 남성은 아까부터 인상을 찌푸리고 휴대폰만 만지작거리고 있다. 시간을 때우는 퇴직자일까? 단정하게 정장을 입은 한 젊은 여성은 손에 쏙 들어가게 작은 작은 사이즈로 프린트한 자료를 연신 들여다보며 가끔 생수병을 들어 목을 축인다. 면접시험을 기다리는 것 같다. 목에 사원증을 건 다른 젊은 여성은 샌드위치 하나를 사들고 한숨을 쉬면서 내 옆에 앉았다. 고개를 떨구고 계속 바닥만 쳐다보다가 내키지 않는 듯 먹기 시작한다. 숨 막힐 것 같은 사무실에서 잠시 빠져나와 숨을 돌리고 있는 걸까?


그들 눈에 난 또 어떻게 보일까?


어떤 형태로든 이들은 모두 세상과 맞닿아 있다. 사무실에 앉아 근무하는 건 아니지만 뭔가 하고 있다. 돈으로 바꿀 수 있는 노동 외의 활동은 쓸데없는 것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고, 누구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밖에 나가보면 많은 사람들이 놀고, 걷고, 보고, 일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집에 앉아만 있으면 그 모습을 볼 수가 없다. 함께할 수가 없다. '나가봤자 돈만 쓰지' 싶기도 하고, 부르는 데도 없는데 머리 감고 세수하고 옷 갈아입고 나가는 게 세상 다 부질없을 수도 있다. 그래도 기운이 허락하는 대로 세상과 잠깐 만나자.


정 안 되겠으면 일하는 것처럼 놀고, 쉬어라

회사 다닐 땐 그렇게 일하기가 싫더니 백수가 되고 나자 놀고 있는 자신이 혐오스러워지는 것이 실무자형 인간들의 특징이다. 11시 반에 나가 점심 먹고 커피 마시면서 2시간씩 수다 떨고, 딴짓하면서 초재기하다가 칼퇴하고, 결국 일이 밀려 야근하던 과거는 다 까먹고 이제 와서 좀 논다고 스스로를 자학한다. 그때도 게으르긴 마찬가지였다. 다만 최소한의 임금 노동을 했을 뿐.


정 힘들다면 그냥 일하면 된다. 사장은 바로 당신. 나날이 통장 잔고가 줄어드는 게 괴로우면 이참에 필요 없는 물건을 좀 정리해서 중고 판매로 소소하게나마 회복하는 것도 방법이다. 가족과 함께 사는 경우라면 일단 집안일(aka 가사노동)에 동참하라. 그간 회사일에 집중하면서 이쪽에는 손톱만큼도 신경을 안 썼다면 그건... 누군가 당신이 나눠서 해야 할 일을 다해주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사, 도배, 방수공사 등 규모가 큰 거사가 있다면 시간도 잘 가고 새로운 경험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취업을 준비하면서 일단 뭐라도 배우는 사람들도 많다. 이런저런 강연이나 워크숍에 참여하거나 학원 등록, 더 본격적으로는 자격증 공부에 학점은행까지 다양하다. 다만 배우는 것과 그걸 소화해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은 다른 문제. 학원 강의 많이 들었다고 수능 점수가 올라가는 건 아닌 것처럼 욕심껏 잡아봤자 일주일 내내 괜히 번잡하고 피곤하기만 하다.


나 역시 퇴사하자마자 알차게 보내겠다며 강연, 워크숍, 세미나, 모임 등 스케줄을 바쁘게 잡았다가 체력이 고갈된 경험이 있다. 하루 종일 밖에서 떠돌다 보니 쓸데없이 돈도 많이 썼다. 게다가.. 강의는 열심히 들었는데 복습을 안 해서 다 제자리.. ㅠ


더 본질적인 문제에 집중하고 싶다면 이 참에 몸과 마음을 점검하는 것도 좋다. 일에 살고 직장에 목매는 실무자형 인간이 퇴사할 정도라면 알면서도 지금껏 무시했던 크고 작은 몸의 위험신호들이 있을 것이다. 가장 마음에 걸리던 증상 관련 과부터 시작해 진료를 받아보거나 아예 전체적으로 건강 검진을 받아보는 것도 좋다. 뭐가 나올까 무섭긴 하지만 또 이때 아니면 시간이 나지 않을 수도 있다. 치과, 안과, 정형외과, 내과... 돌아다니다 보면 시간도 잘 간다.


다만 아프다는 상황에만 집중해 다른 것들을 미루는 일은 없어야 할 것 같다. 내 경우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여기저기 아파서 여러 과를 섭렵했는데 왜 건강염려증이나 신체화 증후군 같은 것이 생기는지 알 것 같았다. 몸 아픈 게 제일 큰 일이니 '나 아프다'하면 주변에서도 좀 용인되는 분위기 때문에 슬몃 이 참에 이걸로 시간을 때울까 하는 유혹이 순간적으로...


물론 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질환이 있다면 치료가 최우선. 다행히 그렇지 않다면 진단 결과를 바탕으로 앞으로는 소소히 신경 쓰면서 유지하면 될 일이다. 기초대사량이 높아서 '먹어도 먹어도 살이 안 찐다'는 극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실무자형 인간들은 오랜 외식과 배달음식으로 다져진 복부지방 및 과체증 증상이 있을 테니 이 참에 다이어트를 하는 것도 보람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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