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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즈 uze Jul 26. 2019

피차 민망한 면접  

누군가의 '선의'가 빚어내는 반나절의 촌극

채용공고는 그 회사가 어떤 사람을 구하고 있는가에 대한 일종의 '제안요청서'다. 맡을 업무는 이거니까 뭘 전공했으면 좋겠고, 어떤 분야 회사 경력이 있었으면 좋겠고, 특기는 뭐가 필요하고 등등. 정부 및 지자체 산하 기관뿐만 아니라 일반기업도 요새는 NCS(직무능력표준, National Competency Standards) 기반으로 제시하는 경우도 많다. 경력직은 여기에다 몇 년 차를 원하는지 구체적으로 따로 표기한다. 이에 따라 연봉 하한-상한선이 결정되기 때문.


난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정기적으로 각종 취업사이트를 섭렵한다. 물론 나는 경력직 공채로 어딜 가기에도 역대급 나이라서(심지어 면접위원으로 간 적도 있음) 해당사항이 거의 없지만 그래도 어쩌다 괜찮을 것 같다, 싶으면 응시하기도 한다. 근데 그런 자리가 대부분 기간제, 시간제, 임기제, 계약직.. 허나 어쩔 수 없다. 경력 10~15년이 넘어 동종업계, 동일업무면 다운시프트는 정해진 일. 가뭄에 콩 나듯 얻어걸리는 내 것보다는 스트레스와 불안정한 미래를 호소하며 줄기차게 퇴사 의지를 어필하는 주변 지인들(경력 3~10년 차까지 다양)을 위해 습관적으로 정보를 뒤진다. 이러면서 내가 느낀 경력직 연차 표기 뒤에 숨겨진 행간은 다음과 같다.


경력 1년 이상 / 알바로 이미 실무를 꿰뚫은 신입이 있다면 가성비로 퍼펙트. 없다면 최대 3년 안쪽으로 쇼부치고 싶어. 우리 회사 돈 없고, 넌 오면 바로 막내임. 할 일 많을 거야

경력 3년 이상 / 경력 1년 이상과 이하동문

경력 5년 이상 / 3년 짜리면 정말 좋을 텐데 안되면 어쩔 수 없지. 딱 5년까지! 그 이상은 곤란해

경력 7년 이상 / 어쩌다 나왔냐 그래. 그냥 좀 다니지. 한 8년까진 어케 봐줄게. 대신 옛날 회사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밥값을 해. 더 다녔다고? 미쳤구나! 팀장님이 네 나이야!!!

경력 10년 이상 / 아이고 잘 오셨어요. 퇴직금은 어떻게 이미 투자하셨나요? 지인들은 많으신가요?


이 암묵적인 룰에 따라 1차 서류전형 이후 면접자가 정해지게 되는데, 이때 스텝이 꼬일 때가 있다. 바로 높으신 분들이 아직 덜 추려진 상태의 지원서류들을 보다가 '이 사람도 재밌겠네, 함 보자' 할 때다. 직접 같이 일해야 할 실무 팀장이나 예산 안에서 인건비를 짜내야 하는 인사, 회계 담당자들 얼굴이 썩소로 굳는 게 바로 이 순간. 공공기관들도 정치적 올바름을 보여주려고 그러는 건지 면접에 가보면 어쩌면 이렇게 골고루 잘 갖춰 놓았나 싶은 경우가 있다. 청년 1, 기혼 여성 1, 비혼 여성 1, 가족을 부양하는 중년 남성 1, 은퇴자 1 식으로. 어차피 원서는 차고 넘치니 표본집단 추출이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난 이 경우를 몸소 겪었음. 한 회사에서 육아휴직 대체자로 1년짜리 계약직을 뽑는데, 물론 채용공고에는 '2년 이상'으로 되어 있었으나 이력서 업데이트도 할 겸, 혹시 되더라도 1년 짜리니까 부담 없겠지 싶어 넣어봤다. 근데 오매, 면접 보라고 연락이 온 거다.


면접자는 총 4명. 5명의 면접위원이 각각 질문을 하나씩 하고, 면접자들이 돌아가면서 대답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복도에 놓인 의자에 옹색하게 앉아서 기다리는데 면접 직전 회사 쪽 실무자가 연봉 상한선을 귀띔해 주었다. 너무 힘 빼지 말라는 배려인가 여겨질 정도의 깜찍한 금액. 그 때문인지, 대기실부터 그간 쌓인 연륜을 자랑하듯 여유로운 태도를 취하고 있던 한 지원자가 면접 내내 폭주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경력을 과시하면서 중간중간 상대 기업의 약점까지 거론했다. "솔직히 귀사 사업은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아요. 좀 더 공격적인 홍보를 해야..." "여기 대표님도 앉아 계시지만 사이트 운영을 이렇게 해서는..."


1년 공백을 알차게, 그러나 '가볍게' 채워줄 사람을 뽑는 자리임이 확실해졌으니 해당되지 않는 사람들은 대충, 그러나 예의 바르게 맡은 바 역할을 다하고 퇴장하면 될 일인데, 아마도 그분은 '* 먹어봐라'는 심산이었나 보다. 하긴 면접 시간이 평일 2시 30분. 현직에 있다면 반차, 조퇴도 못하고 온전히 하루 연차를 써야 하는 애매한 시간대였다.(면접비는 엄감생심)


모든 면접이 어쨌거나 그럭저럭 끝나고, 담당 실무자는 면접위원님들 챙겨야 해서 죄송하다며 1층 로비 책상에 이름표를 놓고 가달라고 당부했다. 말씀대로 이름표를 놓고 돌아서던 길, 정장 재킷 상의를 주차해놓은 차에 던져 놓고 담뱃갑과 라이터를 챙겨 구석으로 가던 그 지원자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만약 그가 된다면 정말 채용비리일 테니 제보해볼까 생각도 했지만, 결국 발표를 보니 공식 홈페이지에 나온 정보를 딸딸 외워 기계적으로 읊던 4년 경력의 젊은 처자가 됐다. 어쨌거나 초기 취지에 맞는 '인재'가 된 셈이니 다행.   


채용공고에 경력 요건이 표기되어 있긴 하지만, 때로는 나같이 걍 한번 내볼까 하고 끼어드는 얼간이도 있고, 또 너무 절실해서 일단 내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니, 그냥 필요한 자리에 맞는 사람들만 추려서 2차에 부르면 어떨까 하는 바람이 있다. "이 사람도 한번 보자"고 하지 말고. 어차피 피차 민망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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