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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 Feb 24. 2021

일요일에는 짜장을 해줄까

  거실에 아무렇게 놓인 장난감에 햇빛이 비치자 음영이 선명해졌다. 불 꺼진 거실에 베란다 창 모양으로 햇빛 무늬가 생겼다. 평일 오전 11시, 나는 이 시간을 좋아한다. 아기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온 뒤라 집안은 아기 울음소리 없이 조용했다. 식탁에 앉아서 고요한 햇빛이 거실에 방문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졌다. 오늘은 식탁에서 노트를 하나 펼쳤다. 노트 맨 위에 ‘월, 화, 수,...’ 하고 요일을 적기 시작했다.


  요즘 가장 큰 고민은 ‘뭘 먹이지?’였다. 곧 15개월인 우리 아가는 두 달 전부터 유아식을 시작했다. 이유식을 먹일 때는 인터넷에 있는 식단으로 3-4일치씩 만들었는데, 유아식으로 넘어오면서는 식단이 없어졌다. 반찬 고민이 시작되고, 재료를 사들이고, 다쓰지 못한 재료가 상해서 버려지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럴 때면 남은 재료로 뚝딱뚝딱 맛있는 반찬을 만들어내는 금손 엄마들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부엌에 붙여둔 어린이집의 이번 달 점심 식단을 바라보다가 문득, 저녁 식단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반찬 재료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메뉴를 고민하는 시간도 줄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노트에 요일별 식단을 적어나갔다. 이틀 치 식단을 써놓고 손이 그대로 멈췄다. 더 이상 메뉴가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핸드폰을 켜서 아기 반찬을 검색했다. 있는 재료로 만들 수 있는 새로운 메뉴를 찾아 핸드폰 화면을 넘기면서 남은 요일을 채워나갔다. 그러다 보니 시간은 1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거실에 햇빛이 더 길게 밀고 들어왔다. 토요일, 일요일을 남겨두고 다시 한번 고민에 빠졌다. 주말이라 점심 메뉴도 추가로 고민해야 했다. 노트의 빈칸을 아무리 봐도 메뉴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대로 노트 한구석을 바라본 채 멈췄다. 식단 고민은 어느새 멍 때리기로 바뀌었다.


  멍 때리는 시간 사이로 어느 블로그의 글이 머릿속을 밀고 들어왔다. 수요일은 아기에게 특식을 해주는 날로 정하려고 한다고 했다. 그리고 특식으로 아기 파스타를 만드는 과정을 써둔 글이었다. 블로그 작성자는 어릴 때 수요일마다 학교 급식으로 특식이 나왔는데, 덕분에 수요일이 가장 좋아하는 요일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의 아기에게도 특식 데이를 지정해주고 싶다고 했다.



  “너는 무슨 요일이 가장 좋아?”


  불쑥 친구의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머뭇거리자 친구가 이어서 이야기했다.


  “나는 목요일이 제일 좋아. 다음 날이 금요일이잖아.”


   교실 안에서 흰 셔츠에 교복 조끼를 입은 친구가 말을 이었다. 일요일은 다음날이 월요일이라서 싫고, 토요일은 쉬는 날이 하루밖에 안 남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싫다고. 금요일에는 주말 지나면 월요일 오는구나 싶어서 별로라고 했다. 주말을 기대하기 가장 좋은 요일이라 목요일이 좋다는 친구의 말이 15년도 더 지난 지금 선명하게 들리는 듯했다. 사실 친구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옆자리에 앉았던 친구인지 앞자리에 앉았던 친구인지도 모르겠다. 기억나는 건 오직 교복과 그 친구의 말 뿐이었다. 나는 요일 하나로 신나서 조잘조잘 떠드는 그 아이가 신기했다.


  왜인지 살면서 이따금씩 그 친구의 질문과 대답이 머리를 스쳤다. 어딘지 신났던 그 아이의 목소리 톤은 기억이 사라지면서 더 미화되는 듯했다. 친구의 밝은 목소리와 달리 질문을 듣고 당황하며 대답조차 못한 내 얼굴이 어둡게 굳었던 것 같다. 가장 좋아하는 거. 그 단순한 질문이 왜 그리도 어려웠을까. 미적분을 척척 풀어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마주한 단순한 곱하기가 어렵게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나는 좋아하는 게 거의 없었다. 요일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가장 좋아하는 반찬도, 가장 좋아하는 색도, 좋아하는 가수도 없었다. 내 학창 시절과 비슷한 시기를 그려낸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을 보면 알겠지만, 그 시절 여자 아이라면 대부분 아이돌 가수 하나쯤은 붙잡고 팬 활동을 했다. 하지만 나와는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내가 비교적 즐거운 기억을 꺼내보기 힘든 이유는 기억력 문제도 있겠지만, 아마 좋아하는 게 많지 않은 것도 그 이유겠지.


  요일 이야기만으로도 기분이 좋을 수 있다니, 그 친구가 누릴 인생의 즐거움은 얼마나 많을까. 좋아하는 요일과 반찬, 가수가 있다면 행복을 맞닥뜨리는 날이 더 많을 것 같다. 우울한 어느 날 식사하러 갔다가 자신이 좋아하는 반찬이 나와서 기분이 좋아질 수도 있고, 피곤한 어느 날 좋아하는 요일이 다음날이라는 생각에 힘낼 수도 있을 테니. 또, 길을 가다가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가 흘러나올 때, 아무 이유 없이 신날 수도 있겠지. 분명한 건 수요일을 좋아했다는 블로그 작성자와 목요일을 좋아했다는 학창 시절 내 친구는 일주일에 하루는 확실히 행복한 날이 었다는 거다. 좋아하는 요일을 묻는 단순한 질문이 이토록 오래 머릿속에 남은 이유는 어쩌면 부러움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걸 30 중반이나 되어서 부엌 식탁에서 아기 식단을 적다가 깨달았다.



  우리 아이에게도 좋아하는 요일이 생기면 좋겠다. 그리고 앞으로 좋아하는 반찬이나 가수도, 향도 하나씩 생기면 좋겠다. 행복을 맞닥뜨리는 날이 더 많아지도록 말이다. 나는 노트 위에 비어있는 토요일, 일요일을 보며 고민했다. 내가 점심을 해주는 이 이틀 중에 어떤 날을 특별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까. 냉장고 속 재료도 다시 떠올려봤다. 생각해보니 지난 주말에 장 봐온 것 중에 아기 짜장이 있었다. 짜장은 아직 먹여 보지 않았는데, 이제 시도할 때가 된 것 같다. “짜라짜라짜 짜~파게티” 하는 광고 음악이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일요일은 내가 요리사라고 외쳐대던 그 광고에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났다. 그 광고 덕분에 어떤 이들은 일요일을 특별한 날로 보냈겠지. 블로그의 수요일 특식과 짜파게티의 일요일은 요리사를 섞어서 일요일을 우리 아이의 특식 데이로 정해야겠다. 나는 노트에 일요일 점심을 채워 넣으며 다음 주 특식을 고민했다. 고민이 추가된 느낌도 들어서 다음 주 고민은 다음 주로 미뤄야겠다. 일단, 이번 주 일요일에는 짜장을 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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