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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 Mar 15. 2021

기린을 좋아하는 너와

  우리 부부는 아침부터 분주했다. 3월이 되기 이틀 전, 미리 다가와서 존재감을 어필하는 봄 덕분에 서둘러 외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찬 바람을 막기 위해 패딩을 몸에 두르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따뜻한 봄 햇빛이 차가운 바람과 밀고 당기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아침 식사를 마친 15개월 아이에게 옷을 입히며, 신랑은 외출 가방에 기저귀와 우유 등 아기 용품을 챙기며 바삐 움직였다. 나는 아이 외투로 도톰한 카키색 겨울 패딩이 아닌 노란색 솜패딩을 준비했다. 머리숱이 없는 우리 아이에게 오늘은 니트 소재 모자 대신 챙이 접히는 하늘색 야구 모자를 씌웠다. 신랑과 나는 아이가 낮잠 자기 전에 동물원에 가려고 지하 주차장으로 급히 발길을 옮겼다. 서울대공원으로 차를 타고 가는 30분 사이에 아이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봄 햇빛을 받으며 카시트에 앉아 선잠이 들었다.


  한 두 달 전부터 우리 아이가 그림책과 벽에 붙은 교육용 포스터에 있는 기린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키-이-’라고 ‘기린’이라는 발음을 흉내 냈다. 그 모습을 보고, 우리 부부는 아이를 하루빨리 동물원에 데려가야겠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아직 추운 날씨를 아쉬워만 하다가 봄기운이 느껴지자마자 우리는 신나서 아침 외출을 결정했던 것이었다.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서울대공원 입구에서 동물원까지 걷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는 지난가을에도 유모차를 끌고 서울대공원을 걸었다. 그때는 알록달록한 단풍이 있던 나뭇가지 위에 지금은 햇살만 앉아 있었다. 작년 가을 주말마다 빨갛고 노란 단풍이 물든 길을 아이에게 보여주러 서울대공원으로 나오곤 했다. 10개월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불긋한 단풍으로 물든 주차장과 서울대공원 입구를 지나서, 노란 단풍길을 따라 케이블카 탑승 건물도 지났다. 다시 연두색 잎사귀 사이로 붉은색 잎사귀가 피어나는 그늘 길도 걸었다. 아이에게 처음인 가을 풍경을 우리도 처음으로 유모차를 끌고 걸었다. 아이에게 화려한 나뭇잎을 하나하나 보여주고 있으면 단풍의 색감이 내게도 강렬하게 와 닿았다. 매해 보던 단풍이 이런 느낌이었던가. 아이의 웃음만큼이나 자연이 만들어내는 신비가 새삼 경의롭게 보이곤 했다. 그때는 동물원 건너편 테마가든을 주로 갔다. 장미 화단으로 꾸며진 길과 산책길도 걷고, 그 안에 있는 어린이 동물원도 곧잘 갔다. 어린이 동물원에서 아이를 안고 다니며 헥헥거리던 신랑의 모습이 문득 생각나서 피식 웃음이 났다. 오늘은 같은 길을 걸어서 동물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늘 길이 끝나고, 호수 위 다리를 건널 때였다. 신랑이 코끼리 열차가 지나간다고 아이를 불렀다. 다리 입구 쪽 그늘 속에서 달려 나오는 코끼리 열차가 보였다. 우리는 아이가 코끼리 열차를 볼 수 있도록 유모차를 돌려세웠다. 열차에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다음엔 코끼리 열차를 타볼까 이야기 나누던 우리 부부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왠지 이 대화가 익숙했다. 우리 부부는 전에도 이렇게 고개를 저은 적이 있었다. 아마 아기를 데리고 서울대공원에 처음 온 날이었을 거다. 6개월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서 늦봄의 햇빛이 따가운 이 길을 지났다. 그때 호수 위 다리로 향하는 그늘 길에서 아이는 신나서 발을 동동거렸다. 초록색 나뭇잎 사이사이 보이는 하늘이 신기했던 걸까. 신랑과 나는 그런 아이가 신기하고, 우리가 유모차를 끌고 이 길을 걷는다는 사실도 신기해서 서로 웃었다. 우리는 발을 흔드는 아이와 그늘 끝을 지나 햇빛이 내리쬐는 다리로 들어섰다. 탁 트인 호수의 끝자락에 초록색 숲과 파란색 하늘이 시원한 경치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호수 위, 하늘 아래 걸친 케이블 카가 움직이면서 잔잔한 풍경에 경쾌함 더했다. 그날도 오늘처럼 코끼리 열차가 다리 입구 그늘을 지나 햇빛 속으로 들어왔다. 예전엔 눈부시고 뜨거운 햇빛을 피해 빨리 걷기 바빴는데, 그때는 그 햇빛이 만들어내는 색감이 예뻐서 아이와 즐기며 걷고 싶었다. 그날 우리는 동물원을 가서, 동물은 보지도 못하고 그늘에서 아이와 시간을 보냈다. 아기는 더위에 양 볼이 빨개진 채 방긋방긋 웃으며 우리에게 안겼다. 아직 초록이 돋아나지 않은 풍경 속으로 코끼리 열차를 지나 보내며, 초록이 돋아나던 동물원에서 아이와 함께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올라왔다.


  우리는 코끼리 열차가 간 길을 따라서 유모차를 밀며 걸었다. 동물원 입구에 도착하니, 입구를 지키고 있는 커다란 호랑이 조형물이 보였다. 호랑이는 거대한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신랑과 나는 결혼 전에도 종종 서울대공원에 와서 데이트하곤 했다. 그때 동물원 입구 호랑이는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았다. 나는 호랑이 입을 향해 손을 뻗어서 손이 물릴 것 같은 자세를 취하며 사진을 찍기도 했다. 이제 와서 떠올리니, 흑역사가 따로 없다. 신랑은 지금도 종종 서울대공원에 처음으로 나와 같이 간 날을 이야기한다. 슬라이드폰을 쓰던 때였는데, 내가 신랑 손 한쪽을 달라고 해서 내 손과 합쳐 하트 모양을 만들고, 그걸 핸드폰으로 찍었다. 왜인지 신랑은 그게 그렇게 기억에 남는 모양이다. 그리고 신랑 발밑으로 지나가는 개미들을 보며 내가 신랑의 발 냄새 때문에 개미가 모인 게 분명하다는 말 했는데, 신랑은 그 말 또한 지금까지 농담으로 잘 써먹고 있다. 그때는 양 손 가볍게 서로 팔짱을 끼고 걸었는데…. 대학생 시절 신랑과 이 곳에 올 때면, 추로스 파는 곳을 찾고 우리 둘의 사진을 찍을 곳을 찾아서 다니곤 했다. 그 시절 우리가 가족이 될 줄 알았을까. 이제는 유모차에 아기 짐을 한 가득 싣고, 아이에게 무엇을 먹일지 고민하며 아이가 좋아할 장소를 찾아서 가고 있었다. 기린을 마주했을 때, 우리 아이의 표정과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생각에 설레기도 했다. 서로를 생각하면서 왔던 곳에 함께 아이를 생각하면서 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또 주책스럽게도 감동으로 다가왔다.


  매표소 앞에는 우리처럼 유모차를 끌고 나온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입장문 옆에 달린 화면에서 신랑과 내 얼굴이 뜨고 우리의 체온도 떴다. 정상 체온을 확인하고 입장문 그늘을 벗어나자 밝은 햇빛이 숨을 곳 하나 없는 넓은 공간이 드러났다. 오른쪽으로 놓인 길에 아기자기한 동물 패널이 배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유모차를 벗어나려는 아이를 달래서 동물 패널이 놓인 길을 후다닥 지났다. 패널을 지나서 5분도 지나지 않아서 기린 사육장을 발견했다.


“기린이다! 아가, 기린이네! 기린 어딨어?”


신랑과 나는 신나서 소리쳤다. 울타리 앞에는 이미 몇몇 어른과 아이가 붙어 있었다. 우리는 유모차를 울타리로 바짝 붙였다. 신랑이 드디어 아이를 유모차에서 내려줬다. 아이는 살짝 경직된 표정으로 울타리 너머를 가만히 바라봤다. 기린 두 마리가 목을 넘실거리며 걷고 있었다. 울타리 가운데 기린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높은 전망대가 있었다. 신랑은 아이를 안고 전망대 계단을 올라가서 그 채로 울타리 가까이 몸을 붙였다. 아이는 한쪽 팔을 뻗어서 기린을 향해 손가락을 펼쳤다. 기린 한 마리가 가까이 올 듯 목을 넘실 거렸다. 노란 무늬가 박힌 옷을 입을 아이가 갈색 무늬가 박힌 털을 입은 기린과 마주 보는 순간이었다. 정작 아기는 무덤덤했지만, 신랑과 나는 ‘기린’이라는 소리를 50번도 넘게 외칠 정도로 아이보다 신났다. 어쩌면 아이의 경험이 아니라 우리의 부모 경험을 위해 나왔던 건가 보다.


  아이를 땅에 내려두었더니, 아이가 울타리를 잡고 서서 기린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했다. 울타리 안의 기린이 어디론가 사라진 , 우리는 아이와 걸어서 다른 동물들을 보러 이동했다. 염소와 코뿔소를 발견하면 아이를 부르기도 하고, 동물원 안에서 걸어 다니는 아이를 좇아다니기도 하며 동물원 제일 위쪽까지 갔다. 낮잠 자는 사자를 보며 아이에게 ‘으르렁하고 소리도 내주었다. 졸려하는 아이를 데리고 다시 입구로 내려와서 점심을 먹이자 아이는 유모차 안에서 잠이 들었다.


  나는 유모차를 미는 신랑의 팔에 팔짱을 꼈다. 전에 걸었던 , 전에 같은 길에서 나눴던 대화, 전과 달라진 풍경을 이야기하며 서울대 공원 입구로 향했다. 다음 산책 때는 기린을 보러 왔던 오늘의 산책도 추억이 되어 있겠지. 우리 가족의  많은 추억을   위에 쌓으면,  길도 점점  멋지게 우릴 반겨줄 것만 같다. 그러니, 기린을 좋아하는 너와 앞으로도  길을 자주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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