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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포아빠 Sep 25. 2022

축사: 카레만 3분에 만들 수 있는게 아니다

간신히 여의도 서식기 열 다섯번 째_보좌관의 다양한 일

정치인은 '안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물론 100% 맞는 이야기는 아니다. 안되는 일에는 안된다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정치인이라는 직업이 가진 특징을 잘 보여준다. 선출직이라는 특성상 될 수 있으면 어떤 사람과도 척을 지면 좋을게 없는 직업이란 뜻이다. 법과 정책, 국정을 다룬다는 역할과 함께 그 일을 하기 위해 결국은 사람을 상대하고,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직업인 것이다. 특히, 지역구 국회의원의 경우가 그렇다. 다양한 직업, 계층, 세대로 구성되어 있는 '지역구민', '유권자'들을 늘 의식하고, 이들을 상대하고, 이들의 요구에 반응해야한다. 


아주 사소한 일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지역구에서 항상 일어나는 각종 '행사'에 참석하고, 직접 참석하지 못하더라도 '축사'를 보내 행사 책자에 싣는 것은 지역구 의원의 지역구민에 대한 '도리'라고 할 수 있다. 항상 가득찬 일정 속에 살고 있는 국회의원이 모든 지역구 행사에 참석하긴 불가능하다. 지역구에는 문화, 체육, 교육, 자영업, 장애인, 경제, 시민사회 등 다양한 분야와 세대별로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고, 각급 학교와 복지관 등과 같은 기관에서도 많은 행사들이 열린다. 과거 정치인을 비롯한 기관장이나 지역 유지 등의 지루한 축사를 듣는 관행이 많이 사라지는 변화가 바람직하게 일어나고는 있지만 어떤 식으로든 관심을 표명하는 것은 지역구 국회의원이 지역구민에게 성의를 가지고 있다는 의사표현이기도 하기에 무시할수 없는 일이다. 축사는 지역구 국회의원의 '도리'이기도 하지만 '기회'이자 '특권'이기도 하다. 한 명에게라도 더 이름을 알리는 것이 필요한 국회의원에게 축사를 하거나, 실을 수 있는 기회는 경쟁자에게 가질 수 있는 비교우위인 것이다. 

위 기사에서 보는 것과 같이 정치인에게 소속 당의 행사나, 대통령 선거와 같은 전국 단위 선거에서도 '축사'는 얼굴과 이름을 알리고,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는 기회로 활용된다. 민주주의 아래에서 정치인은 말과 글로 사람들을 설득하고, 자신의 생각과 정책을 알리며, 사람들과 소통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축사를 하는 일도 그저 의례적인 일로만 취급할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축사를 쓰는 일에 많은 시간을 쏟는 것도 쉽지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구의 각종 단체, 기관에서는 자신들의 행사에 국회의원이 축하의 인사를 전해주길 요청한다. 때문에 축사를 쓰는 일은 많은 시간을 쏟아서 하기도 어려우나, 반드시 해야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지역구 국회의원실에서 비서관으로 일할 때 대부분의 축사를 담당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축사 요청이 의원실에 들어왔다. 누가 봐도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단체나, 문제가 있는 행사로 판단될 때는 축사를 거절하지만 대부분 거절할 이유가 없다. 국회의원이 직접 가지는 못해도, 축사를 보내 인사를 하는것이 당연하다. 축사를 요청받는 행사는 일시가 정해져있고, 또 그 행사를 위해 축사가 실리는 책자가 제작되는 경우 축사를 보내야 하는 기한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이도 놓쳐서는 안된다. 


때문에 축사를 쓰는데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은 속도, 신속함이다. 미루지 말고, 요청이 오면 바로바로 처리를 하는 것이 최선이다. 많은 업무들을 수행하면서 축사를 써서 보내야 하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써서 보내는게 마음도 편하고, 업무에도 지장이 없다. 그래서 일정한 틀을 가지고 축사를 쓰게 된다. 대부분의 축사는 시작 인사, 행사에 대한 소감과 축하, 행사의 주요 내용에 대한 언급, 주최측 주요 인사에 대한 격려, 마지막 인사의 순서로 작성한다. 보통 이런 식이다. "안녕하세요. 국회의원 000입니다. 오늘 이런 행사를 개최하신 것을 뜻깊게 생각하고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 이 행사가 성공적이길 바랍니다. 행사를 준비하신 000회장님을 비롯한 관계자들께도 격려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과 가정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많은 축사를 쓰면서 함께 일하는 동료와 "3분에 축사 하나!"를 외치며, 빠르게 축사를 처리하는 내 자신을 격려(?) 하기도 했다. 많은 업무속에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축사를 최대한 빠르게 처리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나의 축사를 쓰는데 물론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신속하게 처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신속하게만 한다고 축사 쓰는 일을 잘하는 것이 아니다. 신속함만큼 중요한 것이 정성과 정확함이다. 아무리 빨리 먹을 수 있는 3분 카레라고 해도 제품에 유해성분이 섞여 있으면 식품으로서의 가치가 없어지듯이, 아무리 축사를 빨리 쓰더라도 그것이 행사의 취지나 내용에 부합하지 않는 부정확하고, 성의없는 것이라면 오히려 국회의원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지는 등 안하느니만 못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소한 축사라도 행사에 대한 관심과 성의가 드러나야 하고, 정확한 정보가 담겨야 한다. 신속과 정확, 모두가 충족되어야 하는 것이다. 


빨리 축사를 써야 한다는 생각에 행사명, 단체명, 주요 인사의 이름이 틀린다면 그건 오히려 실례가 된다. 성의없다거나, 무시를 당한다는 인상을 주게된다. 이 뿐 아니다. 행사와 관련한 정보가 정확하다 해도, 내용이 너무 틀에 박혀서 행사와 구성원들의 특성을 세심하게 살펴 내용에 담지 않으면 좋은 축사라고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중학교 졸업식에 대한 축사에는 "여러분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창창한 미래가 있습니다. 많은 꿈을 꾸고 도전하십시오"라고 하면 좋은 격려가 되지만, 환우회나 노인회에서 개최하는 행사에 이런 표현을 쓰면 오히려 실례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3분 카레처럼 일정한 틀 속에서 빠르게 축사를 처리한다고 해서, 행사의 정보나 취지를 정확히 파악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신속함에만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행사의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지 않으면 오히려 신속하게 축사를 써내는데 방해만 될 뿐이다. 정확한 내용이 있어야 빨리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밝혔듯 축사는 국회의원이 유권자들이 모여있는 각종 단체와 행사에 인사를 하는 '도리'이자 자신을 알리는 '기회'이기도 하다. 때문에 국회의원을 보좌하는 보좌진의 입장에서 축사가 국회의원에게 해가되지 않고 지역구민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는 일이 되고, 과다한 자신의 업무에도 지장이 없게 하기 위해서는 '신속'과 '정확'이라는 배달의 원칙을 잊어서는 안된다. 단, 48초만에는 아주 사소하고 간단한 축사도 완성되지 않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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