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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노 May 09. 2024

앞집 미주

 엄마가 오늘은 집에 없다. 한일 합섬 공장에서 야간 근무조다. 오늘 저녁은 언니랑 내가 해야 한다. 초등학교 5학년 밖에 안 됐는데. 맨날 밥하고 빨래하고. 많이 힘들다. 우리 집은 엄마 아빠가 하루도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자 언니네 집은 땅도 많고 집도 많아 일 안 하고도 맨날 백화점만 다니는데. 나는 발레리나가 되고 싶다. 언니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단다. 근데 엄마는 맨날 돈타령이다. 언니랑 나는 맨날 뒷전이고 영석이만 생각한다. 공부는 언니가 영석이보다 훨씬 잘하는데.      


  부엌 앞마당 가에 놓인 화덕 위에 냄비를 올려놓았다. 언니가 오늘은 학교 합창부 연습 때문에 늦을 거라고 했다. 언니는 얼마 전부터 합창부에서 피아노 반주도 한다. 미워하려고 해도 미워할 수 없다, 언니는 뭐 하나 못하는 게 없다. 이것저것 다 어중간한 나는 뭐 이렇게 밥이나 짓는 수밖에. 하늘이 참 고약하게 맑다.     

  멀리서 뒷집 서영이 뜀박질소리가 골목에 울린다. 서영이가 우리 집 마당으로 뛰어 들어왔다.


  “언니야, 언니야!”     


  서영이가 감색 벨벳 원피스를 입고 손에 악보를 하나 든 채 마루 위로 순식간에 달려 올라간다. 나는 보이지도 않나 보다. 안방과 건넌방을 여기저기 보더니 우리 집 마루 위에서 팽그르르 한 바퀴 돈다. 감색 벨벳 원피스가 참 예쁘다. 그제야 나를 알아챈 것 같았다. 서영이는 마당 가로 달려왔다.


  “미주언니, 영주언니는?”

  “몰라!”     


  나는 최대한 퉁명스럽게 말했다. 서영이 화덕 앞에 쭈그리고 앉은 내 옆에 같이 와서 앉았다.     


  “언니야! 성났나?”

  “니 같으모 성 안 나겄나? 내는 맨날 식모처럼 밥만 하고.”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눈물이 퍽- 쏟아졌다. 쪼그만 서영이 앞에서 울다니. 그게 더 분해서 자꾸 더 눈물이 났다. 결국 어깨까지 들썩이면서 울고 말았다. 그때 갑자기 대문이 텅- 열리면서 앞집 연자가 뛰어 들어왔다. 놀라서 나는 눈물을 손목으로 쓱- 닦았다. 서영이 옆에서 눈물을 작은 손가락으로 닦아주었다.     


  “어? 언니 우나?” 

  “아이다!”

  “으이구, 서영이 니가 또 장난쳐 가꼬 언니 울제?”     


  연자가 굵은 허벅지가 다 보이는 시뻘건 치마를 입고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서영이 눈이 빨개졌다. 연자는 서영이만 보면 사사 껀껀 이렇게 시비다. 저 집안 애들은 전부 왜 저 모양인지 모르겠다. 부자언니도 우리 언니만 보면 괜히 시비 걸고 비꼬고 그런다. 집주인이라고 애들까지 난리다.      


  “연자 니는 모르면 가만있어라! 왜 왔는데?”     


 내 말에 연자가 갑자기 당황했다.      


  “어? 어. 우리 언니가 영주언니 왔는가 가보라캐서.”

  “와? 우리 언니 오던가 말던가?”

  “그기 아이고.”     


  나도 심통이 났다. 부자 언니는 매일 연자를 시켜 이 집 저 집 탐색한다. 정말 짜증 난다. 그때 또 영석이가 동네 꼬마 애들을 데리고 우르르 뛰어 들어왔다.     


  “영석아! 고만 놀고 씻어라! 밥 먹자! 서영이 니도 밥 묵고 가라!”

  “언니야, 담에 묵으께! 맞다!”     

  서영이가 손에 들고 있던 악보를 건네준다.     

  “이거, 로사 언니 집에 몇 개나 있어서 하나 얻어왔다! 영주 언니 주라!”     


  갑자기 서영이가 정말 기특해 보였다.     


  “이거 팝송이가?” 

  “응!”

  “와!”      


  서영이 손을 흔들고 벨벳 원피스를 나풀거리면서 나갔다. 그런데도 마당에서 연자는 아직도 서성대고 있었다.     


  “니는 안 가나?”

  “언니, 야!”

  “머?”


  연자가 울먹이다가 갑자기 눈을 흘기면서 뛰어나갔다. 얌체 같은 계집애! 제 언니나 부모 믿고 아무 집이나 자기 집처럼 들어와서 밥 달라 간식 달라 매일 난리다. 정말 얄밉다. 물론 서영이도 자주 오긴 한다. 그래도 서영이는 꼭 뭐가 있으면 챙겨주고 그런다. 그리고 서영이 엄마가 하도 무서워서, 남의 집에서 밥 먹고 들어가면 서영이는 그날 엄마한테 혼이 난다. 그래서 절대 남의 집에서 밥은 안 먹는다. 그런데 저 연자 계집애는 아무 집에서나 자기 집처럼 퍼질러 앉아 밥 먹고 과일 먹고 숭늉까지 먹고 배 뚜드리면서 일어난다. 다리통이 내 허리보다 더 굵다. 


  “짝은 누나, 배고파!”     


  영석이가 부엌 부뚜막에 놓인 오이를 들고 씹어 먹는다. 나도 배가 고프다. 다른 집처럼 엄마가 집에만 있으면 진짜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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