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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가본드 Jul 03. 2024

알긴 뭘 알아, 차라리 모른다고 해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의 공감능력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학교에서 국군장병 위문편지를 쓰라고 해서 "아자쒸 군대에서 맨날 춥고 졸리고 배고프고 엄청 힘들죠? 군대 가실 때 되게 가기 싫지 않으셨어요?..... (후략)"라고 썼다가 담임선생님이 다시 써오라 하셨던 적이 있다.


그때 반에서 유일하게 다시 써오라고 한 게 나였는데, 다시 써오라는 이유를 나는 통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우리 반에서 글을 제일 못썼다는 건가, 내 글이 그렇게 형편없나 꺼이꺼이 탄식했다. 그런데 나중에 곰곰 생각해 보니 어쩌면 그건 글솜씨의 문제보다는 공감능력의 문제는 아니었을까 싶다. 내 결점을 메꾸려고 후천적으로 아등바등하고 있긴 한데 타고난 공감능력은 분명 낙제점이었던 것 같다.


또 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북한의 금강산댐과 우리의 평화의 댐 이야기를 해 주시는데 불쑥 손을 들고 "선생님! 그때 북한이 금강산댐 풀었으면 아파트 몇 층까지 잠기는 거였어요?"라고 하니 선생님께서 "한... 12층까진 잠기는 거였다!" 그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는 "만세! 13층이다!!" 했다가 앞으로 불려 나가서 뒈지도록 뚜드려 맞았다. 이게 나의 공감능력 기본능력치다.




공감과 동감. 이 둘의 차이를 알지 못했다. 공감이 오타 나서 동감이 되기도 할 때는 고치기도 귀찮아서 그러려니 넘어갔다. 어차피 그게 그건데 고민하기도 귀찮고. 그러다가 그게 영어로는 뭔지를 보니 뭔가가 꿈틀거렸다. 공감, 공감, 말은 쉽지만 진짜 공감이란 게 어떤 건지. 얼마나 어려운 건지.


공감 - empathy

동감 - sympathy


em-은 '안으로(in, into)'.

sym-은 '함께(together)'.

-pathy는 옛 그리스어 pathos(고통)의 변형.


그렇다면

sympathy(동감 또는 동정)는 고통을 '함께(sym)' 느끼기.

empathy(공감)는 고통의 '안(em)'으로 들어가기.


길을 걷는다. 커다란 싱크홀이 있다. 이상한 소리가 난다. 나는 아래를 내려다본다. 누구 있나요? 4미터 정도의 캄캄한 싱크홀에 사람이 빠져 있다. 얼마나 무섭고 괴로울까. 나는 그의 괴로움에 동감할 수 있다. 싱크홀 아래를 내려다보며 함께 괴로워할 수 있다. 난 빠지지 않았으니 고통받을 일은 없지만 빠진 이를 내려다보며 고통을 함께 느끼는 동감(sympathy)은 가능하다. 그리고 자신 있다. 얼마든지.


그럼 공감(empathy)은? 고통 안으로 들어가는 일인데, 싱크홀 아래에 빠져 고통받는 이에게 어떻게 공감을 할까? 공감이 어려운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고통 안으로? 그럼 싱크홀 안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아니 그건 좀 아닌 듯..."


"왜 싱크홀로 내려가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시나요?"라고 물으면 아마도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아니 나까지 싱크홀 아래로 내려가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잖아! 빠진 사람을 구하려면 난 위에 있어야 밧줄을 내리든 구조대를 부르든 도움을 주지. 나까지 내려가면 어떻게 구출하냐고?"


이게 우리가 공감을 하기 어려운 이유다. 대상의 고통의 안으로 들어가는 게 본질인 공감은 자주 문제의 해결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고, 어떨 때는 아예 해결과는 정반대로 보이니까. 대상의 고통 속으로 나까지 들어가 버리면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그러기에 공감이 가장 어려운 사람이 바로 가정의 부모님들, 직장의 관리자들이다. 부모님과 관리자는 자신들을 해결책을 제시해야 할 사람으로 인식하니까.


여기, 중간고사에서 답안지를 밀려 써서 시험을 망친 학생이 있다. 부모님은 이럴 때 어떻게 반응할까. 보통은 내려가서 감정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자식에게 어떻게든 해결책을 제시하려는 생각부터 먼저 하니까. 이미 해결책이 없다는 건 정작 자식이 더 잘 아는데도. 이건 나 자신이 오래전 직접 겪은 상황이다. 그래, 실수였다지만 그것도 실력이지. 공부 실력은 시험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상황들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도 포함하는 건데 난 그걸 못한 거지. 그건 그때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분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이씨, 분해서 눈이 빨개진다.


"하여간, 너 정신 안 차리지? 지나간 건 잊어버리고 지금부터 기말고사 준비해!" "중간고사 만회하려면 기말고사 두 배로 잘 봐야 된다, 알았지?" 이렇게 해결책만 제시한다면 자녀는 어떤 마음일까. "몰라! 지금 기말이 중요해! 화나 죽겠는데!" 자녀는 이런 부모님을 자기의 감정을 공감하는 일 따위에는 관심 없는 분들로 여기곤 깊은 속내를 얘기하지 못하게 변해 갈 것이다. 공감을 얻는 데에 실패한 기억이 하나둘씩 늘어 가면서.




다시 싱크홀. 우리는 싱크홀 아래에 빠져있는 상대의 감정을 향해 내려가서 느끼는 게 아니라, 그냥 싱크홀을 내려다보며 "힘들겠다~"하고 안타까워하며 동정하는 경우가 많다. 얼마나 힘들까, 이걸 공감이라 착각한다. 가끔은 감정과잉이 되기도 하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곤 자신을 공감능력이 높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때때로 심정을 동정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나는 어떤 기분이 들었나 생각해 본다. 오히려 더 마음이 안 좋을 때가 많았다. 나는 싱크홀 아래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상대는 나를 내려다보는 느낌이 나서. 내가 싱크홀 밑바닥에 있는데 그 위에서 너의 고통을 다아 이해한다는 사람을 올려다보는 느낌이 유쾌하기는 어렵다.


TvN의 인기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는 고슴도치처럼 까칠한 주인공이 있다. 이름은 동석(이병헌 분). 그가 얼마나 까칠하냐면, 같은 동네에 사는 친어머니에게도 인사조차 하지 않는다. 동석이 어릴 때 홀몸이 된 어머니는 동석이를 데리고 동석이 친구의 집에 첩으로 들어가 산다. 심지어 동석이의 친구의 아버지는 동석이 아버지의 친구이기도 했는데. 어린 시절의 그 고통 때문에 동석은 성인이 되어 친어머니와 완전히 의절하고 지낸다.


그러다 동석의 어머니는 암진단을 받고 시한부 인생을 산다. 동네 형과 누나들이 이 사실을 알려주려고 동석을 술집으로 부른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그만 엄마와 화해하라 한다. 한 명이 말한다. "우리가 네 마음 모르면 누가 아냐? 너 이해한다." 동석은 이 말에 화를 참지 못하며 술잔을 확 내던진다. 그리고는 말한다.

동석은 왜 화가 났을까.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이렇다. 자신의 고통 밑바닥에 내려와 보지도 않고 자신을 다아 이해한다고, 많이 힘들었을 거라고. 동석은 자신이 sympathy(동정, 동감)을 받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진정 이해한다면 그가 어린 시절 겪었던 수치심이나 버려짐, 그 궤적을 맥락적으로 이해해야 진짜 이해하는 건데 너희들이 뭘 안다고. 동석의 무의식은 이것을 정확히 알아챈다. 이건 공감이 아니고 잘해야 동감이나 동정심임을.




내가 생각하는 진짜 공감이란 그런 것이다. 누군가의 슬픈 이야기를 듣고 감정이 가라앉아서 헤어 나오기 어려울 때가 많고 가끔은 눈물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공감능력이 높은 사람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다. 내가 늘 나를 공감능력이 낮은 사람이라 말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 능력이 좋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가 상대에 대해 이해하는 건 '거기까지'가 될 텐데, 그게 싫다.


어쩌면 진짜 공감이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쳐도, 그게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거라도 안다면 내가 지금보다는 약간은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걸 안다는 게 당장 무슨 결과를 가져다주진 못하더라도, 뭔가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는 게 세상에는 가끔 있으니.


공감능력이라는 말은 있어도 동감능력이란 말은 없는 건 세상 쉬운 그 일을 능력이라 하기도 어려워서는 아닐까. 공감이라 말하고 동정하고 있진 않은지, 타인을 이해한다고 착각하고 있진 않은지, 나 자신이 공감능력이 좋다고 잘못 알고 있진 않은지. 이 삼위일체의 착각에 내가 빠져 있진 않은지 살펴보고 싶다. 사람은 늘 착각 속에서 살지만 그렇다고 그게 오랫동안 가져왔던 착각에서 빠져나오려는 노력까지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닐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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