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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가본드 Apr 27. 2022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내놔라!

'따아'도, '아아'도 아닌 따아아! 이젠 낯설지 않은 그 이름.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세요~" 하는 사람은 아마도 귀순한 얼죽아(?) 아니면 그날만 잠깐 외도하는 얼죽아(?)였으리라. 그렇지 않고선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그렇게 입에 달라붙어 있을 수가 없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냐고? 내가 얼죽아라서 안다. 얼죽아한테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커피고, 커피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다. 그냥 <아이스아메리카노 이꼬르(=) 커피>다.




■ 2021년 12월 7일(화)

한 달을 월화수목금금금으로 보내고 매일 풀야근으로 48장짜리 보고서를 만들어서 추장님께 올라갔다. 부추장님, 부부추장님과 함께 갔다. 추장님은 올라온 세 명을 회의 탁자에 앉히고는, 두툼한 보고서를 앞에 놓고 창밖을 말없이 응시한다. 어색한 정적이 모두를 감싼다. 30초, 1분, 2분... 벽시계 초침 소리가 맑고도 맑다.


마침내 추장님께서 정적을 깨셨다.


"자네들, 집에 김장은 했는가?"

"네. 저희는 했습니다."

"저희도 했습니다."

"저희도요."


(또다시 10초의 정적)


"아니이사람들아집에김장을했으면자네들머릿속에김장이라는말이있었을것아닌가?그렇다면추장님김장은하셨습니까?이한마디를못묻는가?김장을해서좀드셔보라고싸들고오라는말이아냐!내집에김장하는데와서도우라는말도아나!나때는누가먼저랄것도없이무배추싸들고와서김장하며가족같이오순도순이야기꽃을피우며사무실에서못한얘기도하고그랬지만지금은80년대가아니잖아세상이좋아지고있잖아내가지금그말을하는게아냐!자네들이김장을안했다면생각을못해서그럴수도있다지만집에서분명히김장을해서머릿속에그일이있을텐데인사로라도추장님김장은하셨습니까그한마디묻는게그렇게어려운가?내가틀린말했나어이거기자네어떻게생각하나?"


나는 시선을 어디에 갖다 놓아야 하는가. 오직 회의 탁자의 무늬밖에 없다.

무늬를 연구하자, 무늬를.

1절, 2절, 3절, 4절. 그리고 30분, 40분, 50분. 보고서는 한 마디 얘기도 꺼내 보지 못하고 털레털레 사무실로 돌아왔다. 최소 일주일은 이 건으로 보고를 드릴 수 없을 것 같다. 이거 빨리 보고 드리지 않으면 뒤에 이어질 일을 진행 못하는데...



12월 15일(수)

(따르릉)

"네 추장실입니다."

"비서 주임님, 오늘 추장님 기분 어떠세요?"

"그냥저냥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네, 지금 보고 드리러 올라가겠습니다."


(5분 후)

"음, 왔는가? 자네들 연말에 수고가 많군. 어디 보자.. 조금만 바꾸면 되겠네. 여기 이 표 말인데, 윤곽선이 너무 가늘어. 선이 가늘면 보고서 전체에 히마리가 떨어져 보인단 말이지. 그리고 셀의 글자들은 가운데 정렬보다는 왼쪽 정렬이 보기에 낫고, 숫자가 들어가는 부분은 오른쪽 정렬을 하게. 그리고 당구장(※) 표시는 다 빼고, 페이지 하단에 각주로 처리하고."

"네."

"그리고 말인데, 올해가 보름밖에 안 남았지 않나. 일은 신속하게 하되, 신속하면서도 여유롭게! 알겠는가?"

"...네. (?????)"
"다음 주 월요일, 20일에 다시 보자."



12월 20일(월)

추장님은 보고서 맨 뒤의 붙임 참고자료 중 해외사례를 소개하는 대목을 보시다가 구석의 인용문에 나오는 '버터플라이(butterfly) 효과'라는 말에 쑤욱 꽂히신 것 같다. 사실 원래는 나비효과라고 되어 있었는데 5일 전의 보고에서 촌스러우니 고치라고 지시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고쳐서 들고 가니 우리말도 아닌 단어가 5글자나 붙어 있는 게 거슬렸나 보다. 보고서의 기본인 가독성에 대해 40분간 강의가 쏟아진다. 보고서 작성 교육 여기저기 쫓아다니며 열심히 배웠던 거 다 소용없다. 'Loma'에는 'Loma'법이 있을 터인데 나는 일반법을 배워왔으니 비싼 밥 먹고 헛공부만 디립따 한 셈이다.


이 타이밍에서 나는 오늘 퇴근길에 마트에서 살 혼술 안줏거리를 고민했다. 화끈한 마라탕에 소주는 어떨까? 빠알간 참다랑어 뱃살과 사케 도쿠리는 어떨까? 그렇게 회의 탁자를 초점 없는 눈으로 바라보며 또다시 무늬연구가 시작되었다.

무늬연구는 나의 생명이요, 나의 힘이다.

이렇게 무늬연구가 단순히 무늬 패턴의 파악에 그치지 않고 뭔가 연상작용이 이루어지는 단계가 되면 그건 곧 무늬연구에 눈을 뜬 것이다. 의지할 것은 오직 무늬연구, 그것뿐이다.

그렇게 나는 무늬연구의 달인이 되었다.

약 40분에 걸친 '피보고자 친화적 보고서 강의'의 결론은 버터플라이가 아니라 버터 플라이(버터 띄고 플라이)로 고치라는 것이다. "빠다 나비! 시각적으로도 좋지만 어감상으로도 얼마나 예쁜가, 자네?"


나는 너무나 말하고 싶다. '추장님, 버터 플라이는 빠다나비가 아니고 빠다파리입니다. 빠다만 먹고사는 파리인지 빠다로 빚어 만든 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버터 플라이는 빠다파리입니다. 인디언식으로 말하면 '빠다 날아가' 정도 되겠습니다.'


이렇게 읍읍읍 하는 중에도 추장님의 말씀은 끝을 모른다. 원래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상대방 말이 귀에 잘 박히지 않는다. 다행히 마지막 말씀만은 기억난다. "아 참 그리고 말인데, 보고서에 말들이 전체적으로 히마리가 없어. 말투는 강력하고 단호하게. 하지만 그러면서도 은근하고 부드럽게! 알겠나?(아뇨 모르겠는데요..) 이번 주 금요일(12.24.)에 다시 보자고."



12월 24일(금)

폰트 배틀이 터졌다! 늘 그래 왔듯 '□'로 시작하는 대제목은 신명 태고딕 16, '○'로 시작하는 중제목은 신명 태고딕 15, '-'로 시작하는 글밥은 신명 태명조 13으로 해서 가져갔는데 추장님께서 대로를 하셨다.


그래서 말씀대로 '□'행은 HY태고딕 15, '○'행은 HY중고딕 14, '-'행은 HY신명조 13으로 통갈이를 해서 부추장님께 처음부터 다시 검토받으니 이번에는 부추장님께서 대로를 하신 것이다. 이것도 보고서냐는 둥, 문서의 기본도 모르냐는 둥, 양쪽에서 핑퐁 치고 나는 탁구공. 일명 폰트 배틀(Font Battle). 사람이 욕을 먹을수록 오래 사는 거라면 나는 이미 영생의 길에 접어들었다.



12월 25일(토)

아이고, 그냥 추장님 vs. 부추장님 다이다이 뜨면 안 되나.. 27일(월) 아침까지 추장님 버전과 부추장님 버전을 두 분 몰래 따로 만들어야만 하는 이놈의 신세. 나의 크리스마스는 이렇게 날아갔다. 크리스마스날 사무실에 나와서 한다는 게 고작 이거다. 온종일 48페이지짜리 문서를 통갈이하고 두 버전을 만들고 있다. 페이지 바뀌는 지점들이 달라지고 목차도 하나하나 확인하고 바꿔야 하니 내가 아주 그냥 꽥 돌아가시겠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이렇게 소심한 분풀이를 하고야 말았다.

허그덩. A4 용지가 동이 났다. 이거 또 석유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물건 아까운 줄 모른다고 하실 테니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휴일인 오늘 인쇄용지 주문해 놔야겠다. 안 그러면 나중에 또 무늬연구다. 아니 그런데 어느 업체도 전화를 안 받네. 옆 과에서 넉넉하게 두 박스 꿔다 놓고 나중에 몰래 사서 갚아야지.



12월 27일(월)

추장님 댁의 고양이님께서 돌아가시었다.



12월 28일(화)

추장님은 안경을 위로 올리곤 꿀이 뚝뚝 떨어지는 스위트한 눈으로 보고서를 바라본다. 어느 부분에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어느 부분에서는 끄덕끄덕. 시간은 계속 흐른다. 10분, 15분, 20분. 벽시계의 초침 소리는 싸늘한 추장실을 가득 채운다.


그렇게 30분이 흘러가고, 추장님은 다시 회심의 한 마디를 투하하신다. "핵심적인 꼭지를 제외하고 과감히 후려쳐서 간결하게. 하지만 그러면서도 빠지는 내용 없이 자세하게!"


언어 소통의 메커니즘상 무슨 말을 들으면 어떤 스키마가 떠올라야 하는데 그게 통 떠오르지 않는다. 어차피 말하는 사람 자신도 애초에 무슨 스키마 따위는 갖고 있지 않았던 듯하니, 해석은 오로지 듣는 사람의 몫이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잘!"이겠지. 그래, 잘. 그냥 잘.



12월 31일(금)

추장님께서 강림하시어 기습적으로 사무실을 습격하셨다. 추장님은 부서 사무실을 말없이 둘러보시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말씀하신다. "아, 자네군. 이번 일 많이 느끼지 않았나? 그렇게 나한테 계속 피드백을 받으니 결과물이 나아지지 않나. 일이라는 게 원래..."


순간 인디언 기우제가 떠올랐다. 기우제를 지내고, 또 지내고, 또 또 지내고, 마침내 비가 오면 그것은 기우제의 효과. 절대로 효과가 없을 수가 없는 그것은 바로 인디언 기우제.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는 사람은 있어도 "따뜻한 냉커피!" 하는 사람은 없어서 다행이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쌩으로 외국어니까 그럴 수 있어도 '따뜻한 냉커피'는 우리의 상상 속에서 밈(Meme)으로만 존재할 뿐 실제 사례는 없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있을까? 아니 설마. 없을 거야.


그런데 말이다. 만약 정말로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아니라 '따뜻한 냉커피'마저도 진지하게 존재한다면 이는 중대한 사회문제일 수 있다. 한 나라의 엄연한 나랏말을, 외국인도 아닌 원어민이, 그것도 쌩외국어도 아닌 일상적 어휘로 조합된 표현을 제대로 못 쓴다면 그것은 그 한 명의 문제를 넘어 그 개인이 속한 집단 수준으로라도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심각한 모순적 문제들이 두루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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