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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가본드 May 30. 2024

손만 잡고 잘게, 오빠 믿지?

서해안에 '제부도'라는 섬이 있다. 지금은 해상 케이블카가 생겼지만 그전에는 찻길로만 드나들 수 있었고 저녁에 밀물이 들어오면 섬에서 나갈 수가 없어져서 요걸 악용하는 사람이 꽤나 있었다고 하니, 다리 아픈 그녀를 업고 해가 깍궁 떨어질 때까지 섬을 헤매다가 그녀가 등에 업은 할머니 귀신처럼 점점 무겁게 느껴질 때쯤 많은 사람들이 곧잘 써먹던 말이 바로 이 '오빠가 손만 잡고 잘게' 였다고 전해진다.


손만 잡고 잘게!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은 손 잡기 말곤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약속 같지만 듣는 쪽은 물론이요 말하는 쪽조차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니, 그야말로 랑그와 빠롤의 찬란한 향연 되시것따.


이게 무슨 말이냐고? 사람의 손과 입은 몸 전체로 볼 땐 작은 부분이지만 그게 담당하는 지각의 비율(아래 그림)로 보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딱 봐도 이거, 손+입만 70퍼센트는 넘겠네.

입이 민감한 건 당연하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시절부터 인간에겐 자연에서 먹을 수 있는 거랑 없는 걸 가려내는 게 곧 생존의 문제였으니까. 손은? 손도 그럴 수밖에. 포식자를 피하려면 필사적으로 나뭇가지를 잡아야 했으니까(지금도 신생아에게 태어나자마자 철봉을 쥐어주면 필사적으로 잡고 매달린다 하니 그야말로 DNA에 각인된 본능이구나). 신체 각 부위에 투자하는 뇌세포의 비율을 가지고 그 기준으로 사람을 다시 그리면 이렇게 되니 어련할까.

어느 애니메이션에서 봤던 것 같은데...

필사적이라고 했나? 그렇지. 필사적 맞지. 우리가 길거리에서 흔히 보는 서로에게 푹 빠져 있는 연인 관계의 남녀가 서로 손을 꼭 잡고 있는 모습. 그것은 당연하고, 또 필사적이다. 꼭 잡아야 마음이 편안해서라기보다는, 꼭 잡지 않으면 죽을 것 같으니깐.


여기까지의 설명에 따르면, '오빠가 손만 잡고 잘게'라는 말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중노동을 하겠다는 말이다. 여기 '세상에서 가장 힘든 중노동'이란 당신이 생각하는 그 노동이 아니다. 진정한 최고의 중노동은 바로 그 손만 잡고 자는 일이다. 이 말은 곧 오빠는 이제부터 사랑을 지키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힘든 노동을 하겠다는 말이다.

국방부 장관님, 우리 오랜 안보 문제를 해결할, 우리가 찾던 인재가 바로 여기 있어요. 어서 써 주세요. 이왕이면 최전방으로. 네?

아니 뭐, 손만 잡고 자겠다는 게 예외 없이 지탄받을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기야 그 많은 사람들의 속을 일일이 어찌 알겠냐고. 오빠는 진짜로 그런 마음을 품었던 걸 수도 있다. 감각이 손을 타고 쓰나미처럼 콰르릉 밀려 들어올 때 그는 제방의 구멍에 손을 집어넣어 나라를 구했던 네덜란드 소년의 심정과도 같았을 것이다. 이 중노동을 이겨내지 못하면 암흑이 세상을 덮치리라. 아아, 이 재앙을 막아내지 못하면 조국이고 사랑이고 나발이고 국물도 없으리라. 세상은 멸망하고 "a ni e nom e? (아니 이놈이? 찰싹)"와 함께 나가떨어진 자신만 남으리라. 그런데 어쩌나. 정작 문제는 쓰나미가 바로 그 손을 통해서 터져 들어오는 건데.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세합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북 북 북)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북... 북..... 북......)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book book book)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그림) 베스트유머

그렇게 오빠는 하늘의 별을 벗 삼아, 아니 천장의 무늬를 벗 삼아(...), 뜬눈으로 밤을 밝히며 나라와 그녀를 구원했을 수도 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중노동으로 몸은 비록 녹초가 되었으나 그의 마음은 저 알퐁스 도데의 「별」에 나오는 소년의 그 마음이었으리라. 도, 동해물과... 아니 참, 나, 나, 남산 위에... 아, 아니지, 어, 어, 어디까지 했더라? 그런데 그 위대한 구국적 실천의 끝자락에서 그녀는 기습적으로 그에게 묻는다. 오빠는 내가 그때 왜 화났는지 정말 몰라? 알면 말해 보란 말이야.



[덧붙임 (그 말의 올바른 용례)]
작고한 우리 다롱이를 어릴 때 사람과 교감시키려고 "손!" 하면 다롱이가 불쑥 내미는 건 손이 아니라 항상 코였다. 하긴 사람한테나 손이지 개한테 그게 손이냐고. 개는 코지. 그러니까 '오빠가 손만 잡고 잘게' 이건 차라리 사람보다는 개한테 어울릴 말이다. 나는 개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지만 개는 정말 "오빠가 손만 잡고 잘개" 이럴지도 모른다. 개한테면 손은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 최소한 개가 "오빠가 코만 대고 잘개" 이럴 것 같진 않다. 그건 너무 속보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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