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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가본드 Jul 20. 2022

K-직장 생존 필살기 : "사해문서 신공"

사해문서! 영어로는 dead sea scroll! 교육방송의 다큐멘터리에서 가끔 볼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한 흥밋거리가 아니라 K-직장의 일상에서는 이 사해문서의 활용이 생존을 위한 필수 기술이 될 수밖에 없으니, 그것은 바로 관리자들의 변화와 혁신에 대한 맹신에 기인한다.


이게 뭔 말이냐고? '보고의 기술'에 대해 우리가 자기계발서나 교육으로 배우는 건 어떻게 하면 보고서를 더 잘 읽히게 구성할 것인지, 어떻게 하면 나중에 추진할 때 더 좋은지 등이다. 그러나 많은 직장에서는 그런 것보단 어떻게 하면 없는 걸 있어 보이게 할 것인지가 훨씬 중요하고, 어떻게든 승인권자의 오케이만 얻어 내면 그 보고서는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 나중에 추진할 때? 그런 거 모른다. 그때 되면 또 혁신하라 할 텐데 뭐.




12월이다. 내년도 업무 혁신안을 만들라고 한다. 그전에 7월에 느닷없이 하반기 업무 혁신안을 만들라고 해서 여름휴가 일정을 취소하고 연말로 계획을 미뤄 놨던 옆자리 팀원 표정이 그야말로 벌레를 씹은 것 같다.


어쩌겠는가. SSKK(일명 시시까까, 시키면 시키는 대로, 까라면 까라는 대로)가 국룰인 것을. 12월 크리스마스는커녕 주말도 없이 모두가 달라붙어서 다음 해의 '혁신안'을 작성하고 연말에 간신히 보고를 통과했다. 연말까지 승인받지 못하면 그야말로 난리가 나는 거였으니, 다들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새해가 되자마자 "송구영신하라! 혁신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다!"라는 누군가의 신년사 한 마디로, 먹물도 안 마른 혁신안은 불과 보름도 안 되어서 작년 것이라는 이유로 졸지에 쇄신 대상이 되고 말았다. 전문업체 컨설팅까지 받아서 한 달을 야근하며 쥐어짠 혁신안인데, 폐기하고 당장 또 다른 혁신안을 만들어야 하는 이놈의 기구한 신세를 어쩔?


아니 뭣들하나, 빨리 콩 사 오란 말이야, 콩!

목요일에 폭탄이 터지고 다음 주 월요일까지 보고하란다. 어떻게든 시간이라도 벌어야 한다. 부서장님이 올라갔다. 2시간 지나 털레털레 내려온다. 그야말로 나라 잃은 표정이다. 2시간 동안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가 듣고 온 마지막 말은 "혁신이란 것엔 항상 준비가 되어 있어야지, 왜 혁신하자니 그제야 준비하는 것인가?"였다고 전해진다. 이건 내 추측인데 "故이건희 삼성 회장은 마누라 빼고 다 바꾸라 하지 않았는가!" 이것도 있지 않았을까?


필경 그는 2시간 내내 듣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서 회의 탁자를 쳐다보며 무늬연구™만 했을 것이다. 만약 회의 탁자가 민무늬였다면 무늬연구™조차도 할 수 없었겠지만, 그나마 다행히 무늬는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던가. 비장의 히든카드를 꺼낼 때가 왔다. 게임으로 말하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만 나가는 필살기이다. 우어어~!! 5년 전의 사해문서(dead sea scroll)를 꺼낸다. 날짜 바꾸고, 사람 이름 바꾸고, 현재의 상황과 안 맞는 부분을 손봐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5년이냐 10년이냐가 아니라, 보고를 받는 사람이 그 자리에 없던 때 만들어진 것이라야 한다는 점이다.


말은 쉽게 했지만 실제로는 이조차도 간단하지 않다. 보통은 2~30페이지, 길면 50페이지를 넘어가는 문서에서 한 곳을 바꾸면 덩달아 바뀌어야 할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하지만 그나마도 없다면 최소 한 달은 넘는데, 당장 3일 내로 가져오라니 어쩌랴.


12월에 이어 1월도 야근의 향연이다. 월화수목금금금, 월화수목금금금드디어 올해 혁신안 완성되고 간신히 보고를 마쳤다. 이제 다음은 정기 인사발령일을 손꼽아 기다렸다가 모두 도망가기이다. 하지만 튀는 데도 도리가 있다. 연말에 최종 결재까지 받아 놨다가 '20XX년은 혁신의 !!' 누군가의   마디에 졸지에 적폐의 오명을 뒤집어쓴 문서는 당장은 쓸모없게 되어도 사해의 비밀장소에 신줏단지와도 같이 모셔 둬 한다.


왜?


나는 없더라도 이곳은 영원할 것이고, 이 문서는 훗날 또 하나의 사해문서가 되어 5년 후가 됐든, 10년 후가 됐든, 혁신의 태풍 앞에서 등잔불과도 같은 누군가를 기적처럼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문서란 골동품과도 같아서 장구한 세월이 지나 비로소 그 진정한 가치를 발하는 것이니, 이것이 곧 사해문서 신공이라 불리는 K-직장인의 생존 필살기 되시겠다.


혁신이 반드시 뭔가 나아져야만 할 필요는 없다. 혁신 지나간 자리에 풀 한 포기 안 남아도 목초지가 황무지로 바뀌었으니 어쨌든 혁신은 혁신이다. 사람 바글바글하던 일터에 파리 새끼 한 마리 안 남아도 마찬가지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직장인은 떠나며 사해문서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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