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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가본드 Jul 13. 2022

또라이와도 같은 습관

어디 가서 말하기 어려운 나의 비밀 하나. 내겐 오래된 습관이 하나 있다. 책을 읽기 전에 책갈피에 코를 박고 최대한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이걸 하지 않으면 책이 읽히지 않는다. 문장들이 내 안으로 쏙 들어오지 않고 겉돌다 튕겨나가 버린다. 손끝 느낌도 뭔가 미끄덩한 것이 착 달라붙는 느낌이 아니다.


말하자면 '지금부터 이 책을 읽을 거니깐 이 책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라고 스스로에게 주는 명령이다. 애초에 이것까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 나는 집에 있는 책이란 책은 눈을 가리고도 냄새로 다 맞힐 수 있다.


서점에서 책을 구경할 때도 킁킁 킁킁 킁킁이다. 멀리서 보면 마치 책에 껌을 뱉는 것처럼 오해받을 수 있어서 서가 뒤에 숨어서 한다. 그래야만 책이 마음속에 남는다. 결국 나에겐 이건 책의 아이덴티티를 머릿속에 각인하는 하나의 의식인 셈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학생들은 책가방을 전날 밤에 챙겨 놓고 자지만, 그때 난 늘 아침에 챙기곤 했다. 찌그러진 눈으로 일어나서 가방을 쏟고 하나씩 번갈아 집어 든다. "킁킁 이건 국어, 킁킁 이건 영어, 킁킁 이건 사회... 아, 어제는 목요일이었군! 그렇다면 금요일인 오늘은...(요일별 시간표는 반드시 외우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이젠 책꽂이에서 책을 하나씩 번갈아 빼들고 "킁킁 이거 수학, 넌 가방에 들어가고, 킁킁 영어, 넌 꺼지고..." 이게 되는 거다.


하나둘 킁킁.

둘둘 킁킁.

셋둘 킁킁.


그런데, 하루는 성적표가 집에 도착하던 날 집에서 쫓겨난 적이 있다. 다 기억나진 않고 영어가 32점이었던 건 확실히 기억난다.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 학교로 허이허이 가서 텅 빈 교실의 의자를 줄줄이 이어 놓고 잤다. 다음날(화요일) 책가방은 하나도 못 챙겨갔고, 없는 책은 딴 반에서 빌려서 때웠다.


월요일은 집에 못 들어가고, 화요일 들어가고, 이젠 수요일이다. 늘 그렇듯 잠에서 덜 깬 채 가방을 우르르 쏟는다. 킁킁 이거 국어, 킁킁 이건... 아아, 어제는 월요일이군. 이것이 파악되면 다음은 화요일 조합을 찾으며 '생물 어딨냐.. 영어 어딨냐..' 이것저것 들었다 놨다 하면서 이제 또다시 킁킁이 시작되는 것이다.


하나둘 킁킁...

둘둘 킁킁...

셋둘 킁킁...


1단계 킁킁과 2단계 킁킁을 거쳐서 화요일 책가방이 완성되었다. 그 상태로 이틀 전에 집에서 쫓겨났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퍽도 기억이 나겠다. 수요일 시간표를 챙겨야 하는데 화요일 시간표를 챙긴 것이다. 화요일은 시간표 아예 못 챙겨가고, 수요일은 잘못 챙겨가고.


책은 눈으로만 읽는 게 아니에요. 누가 그러냐고요? 제가요.


시험 하나를 혼신의 힘을 다해 준비하던 때가 있었다. 헌법과 경제학 책이 특히 보기 싫어서 포도 껍질을 뒤집어서 속표지에 삑삑 칠해 봤다. 상큼한 포도향이 감돌면 책이 조금은 좋아질까 했지만, 포도향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고 피투성이처럼 끔찍한 얼룩만 남았다. 딸기를 삑삑 칠해 봤는데 이번에는 파리만 달려들더군.


책장에 방향제를 칙칙 뿌려 보았다. 편백나무에서 추출한 피톤치드향이었는데, 상쾌한 피톤치드향 덕분에 책이 좋아진 게 아니라 오히려 책 때문에 피톤치드향마저 덩달아 싫어지고 말았다. 책을 펼치면 피톤치드향 속에서 삼림욕을 하는 듯한 느낌이 나게 하고 싶었지만, 책을 펼 때마다 방에 가득 퍼지는 피톤치드향 속에서 1818 욕만 하게 되고 말았다. 어쨌든 삼림욕은 삼림욕이다. 


그 후에도 비슷한 상황이 몇 번 있었지만, 책 내용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데 향이 좋다고 책이 좋아지진 않았다. 정확히는 책이 별로인데 향은 좋은 건 내 기준에선 있을 수 없다. 내용이 메롱이면 냄새도 메롱메롱이다. 대형 서점에서 책 향수(book perfume)도 팔던데 내겐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마음에 드는 책은 이미 그전부터 마음에 들어 있고, 그렇지 않은 책이 향을 뒤집어썼다고 좋아진 적은 한 번도 없다. 


하지만 책 내용이 마음에 들고 문장도 좋으면 그 책의 냄새도 향기롭다. 그리고 책을 쓴 사람 자체도 향기롭게 느껴진다. 그래서 내 방은 향기로 가득하다.


언제부터 책향에 맛들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어릴 때는 게을러서였다면 지금은 진짜로 책향이 좋아서로 이유가 바뀌어 있다. 책이 좋으면 책향은 무조건 좋다. 그리고... 사람도 좋다.


내겐 책과 사람과 향기는 삼위일체로 하나이다.



< 글 - 배가본드   그림 - pixaba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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