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두 과목이 진절머리 나도록 싫었다, 국어와 미술이다. 트라우마가 된 사건이 하나씩 있었는데, 이렇다.
그날은 음운현상 '된소리 되기'를 공부하는 날이었다. 그때 선생님의 성함은 '강인구'였고, 강인구 선생님은 '인기'를 예로 들었다. 인기라고 쓰고 [인끼]라고 읽는다는 것이다. 순간 나는 미칠 것만 같은 궁금증에 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선생님 그런데 강인구는 왜 강인꾸가 아니에요?"
앞으로 나오란다. 다들 보는 앞에서 뒈지도록 맞았다. 맞은 것도 수치스러웠지만, 왜 맞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강인구는 왜 강인꾸가 아닌지 나는 정말로 심각하게 궁금했다. 아니 선생님한테 안 물으면 그럼 어디 가서 물으란 말인가? 화나서 집에 울면서 갔다. 집에 오니 어머니가 왜 울면서 오냐고 물어서 자초지종을 고하니, "잘못했네!" 이러시는 거다! 그 한마디에 더욱 분해서 또 눈물이 났다. 하지만 궁금증도 해결 못하고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인기는 인끼인데 강인구는 왜 강인꾸가 아니냐고 백방으로 묻고 다녔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공부나 하라는 놀림뿐이었다. 이씨 이게 공부지 그럼 게임이니?
어릴 때부터 나는 그림 그리기를 못한다. 그냥 못하는 게 아니라, 찐따같이 못한다. 완전히 처참한 수준이다. 가장 괴로운 상황은 방학숙제로 뭔가 그려 오라는 과제가 떨어질 때인데, 그림 그리는 것 자체도 힘들지만 소재를 찾는 것도 너무 힘들었다. 이렇게 되면 나는 큰 미술관에 털레털레 가서 뭔가 아이디어라도 좀 얻어 보려고 했다.
그런 나에겐, 경기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은 거대한 던전과도 같았다. 미술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과제를 하기 위해 온 거였으니 이건 문화 향유가 아닌 중노동일 뿐이다.
그렇게 몇 시간째 미술관을 허이허이 돌고 있는데, 그림이 있어야 할 자리 하나에 그림은 없고 백지만 걸려 있었다. 나는 그림을 교체 중인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없는 그 자체가 그림이었고 제목은 '화이트'였던 것이다(진짜).
아! 이거다! 너로 결정했다! 더 볼 것도 없었다. 빛의 속도보다 빨리 미술관을 빠져나와서, 집에 오는 길에 문구점에 들러 제일 큰 종이와, 파란색 포스터 칼라 20개를 샀다. 큰 종이를 방바닥에 펴 놓고, 세숫대야에 물을 붓고 포스터 칼라를 풀었다. 그리고는 아예 붓도 아닌 빗자루로, 대문짝만 한 종이를 시퍼러무루딩딩하게 칠해 놓았다. 그리고는 빨래집게로 햇볕에 널어 말렸다. 혹시나 눈먼 파리라도 달라붙어 뭉개져 죽을까 선풍기를 틀어서 옆에 놓아주는 센스도 잊지 않았다.
역사적인 다음날. 마침내 그림이 완성되었다.
나는 처음에만 해도 숙제를 어떻게든 해치우기에 급급했는데, 이렇게 되자 은근 욕심이 났다. 미술관에 전시된 유명 화가의 작품과 견줄 명작을 만들어 갔으니 큰 칭찬을 받겠지. 어쩌면 내 팔자가 나비효과처럼 이 하나로 바뀔 수도 있어! 이때 나는 방학 중에 개학날이 기다려질 수도 있는 기적 같은 체험까지 했다.
그리고는 개학날 학교에 갔는데, 이름 부르면서 앞으로 나오라는 거다. 그리고 저어기 교실 맨 뒤에 있는 청소함에 가서 빗자루 제일 큰 거 하나 꺼내 오라는 것이다. 꺼내 오라는데 어떡해. 꺼내서 삘삘 가져갔다.
이렇게 되어서 또 뒈지도록 뚜드려 맞고 자리로 쫓겨 들어왔다. 강인꾸 사건 직후에 다른 선생님을 상대로 있었던 일인데, 비슷한 사건이 연달아 터지니 이 블루 사건의 무게는 사뭇 크게 다가왔다. 크흑 분하다. 분해서 살 수가 없다.
배가본드 왈(배가본드 짖기를), 아니 누군 백지 하나 달랑 걸어놓고 화이트(White) 해놓고 명작이라고 돈을 버는데, 누군 똑같은 걸 만들고 돈은커녕 뒤지도록 뚜들겨 맞고, 도대체 이게 말이 되냐고?
이 사건 이후로 나는 전에도 싫던 미술이 더욱 싫어졌다. 전에는 그냥 못해서 싫었고, 이날 이후로는 억울해서 싫었다. 예술가는 똥을 싸 놔도 예술이 된다더니만, 정말 세상은 심각하고 진지하게 불공평하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 너무 일찍 알아 버렸기 때문이랄까. 뭐 뒤지도록 뚜들겨 맞고 인생의 큰 교훈을 얻었으니 남는 장사 야니냐 할지는 몰라도, 교훈도 교훈 나름이지 그런 더러운 교훈은 차라리 모르는 게 낫다 싶었다.
주말에 날씨가 너무 좋아 발길 닿는 대로 길을 나섰다. 내 발길이 닿은 곳은 바로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이다. 미술이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집돌이가 광합성이 하고 싶었음이다. 와 봤지만 처음 와 본 듯한 묘한 느낌, 그리고 까맣게 잊고 있던 옛날의 '화이트'도 다시 생각났다. 미술이란 것에 학을 떼고 닭도 떼고 오리도 떼게 만든 화이트는 아직도 있을까? 딴 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화이트만 죽어라 찾아 헤맸다. 화이트 어딨냐, 화이트...
화이트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바깥 세상은 산이 평지가 되고, 바로 옆의 서울대공원에 그때 있던 동물들은 이젠 다 늙어 죽고 모두 새 동물로 바뀌었을 것 같지만, 화이트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한결같다. 미술관의 시간은 조금도 흘러가지 않았구나.
그림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림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 중립적 백지뿐이다. 그렇다면 삼라만상 모든 것들도 그 자체로는 가치중립적인 것이며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오로지 인간일 뿐이다. 그 무한상상을 어느 방향으로 발동하느냐에 따라 같은 것이라도 완전히 다른 해석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림은 존재한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미술 찐따다. 하지만 이제 이 그림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고 다시 이 그림을 보니, 그래도 하나는 알 것 같다. 내가 그때 왜 억울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지.
예수나 석가가 말하는 사랑과 히틀러의 사랑이 같을 수 없듯, 최명영의 화이트와 배가본드의 블루도 같을 수 없다. 최명영 화백은 그때 이미 '정신화'의 거장이었으니 이런 그림도 의미 있게 받아들여지는 거지, 배가본드 놈이 '블루' 하면 같은 맥락이 되는 건가? 화폭에 담아 내는 음식 자체가 아예 없었는데...
사람을 당장 눈에만 보이는 것으로 보지 말고 맥락적으로 파악하자고 늘 외치며 살았는데, 정작 나는 그걸 실천하지 못하고 있었다. 강인구는 왜 강인꾸가 아니냐 하질 않나, 영어는 32점 받고 집에서 쫓겨나질 않나, 받아쓰기 시간에 티끌모아 태산을 못 받아써서 '티골모아 태산'이라고 옆짝 답안지를 따라 그렸다가 그놈은 맞고 나는 틀려서 이씨 네놈이 글씨 개같이 써서 이렇게 됐다고 너 때문이라고 싸우질 않나, 그런 궤적을 그리던 놈이 '블루'를 만들어 가서 '화이트'와 같은 취급을 받으면 오히려 그게 더 불공평 아닌가?
세상은 얼핏 불공평해 보여도, 알고 보면 참 공평한 것 같다. 애초에 최명영 화백이 전하고자 했던 의미에 그것까지도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무슨 의미였든 지금의 나에게는 최명영 화백의 화이트(White, 1979년 작)는 인생 그림이다.
하나 또 놀라운 것은 시간의 힘이다. 억울함과 분함으로 가득했던 그때의 마음, 그 분함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깨달음이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시간의 힘이다. 청소함에서 빗자루 제일 튼튼한 거 꺼내오라고 해서 나를 비인간적으로 팼던 그때의 선생님이 먼 훗날의 그런 깨달음까지 의도하셨을 것 같진 않지만, 이제는 그 선생님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오늘, 사람을 현 위치로 파악하지 않고 그 사람의 궤적에 투영해서 그 사람의 모든 말과 행동을 맥락적으로 파악하리라는 나의 기본 신념과 또 한 번 만나게 된다.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나에게 이 놀라운 깨달음을 준 최명영 화백의 화이트(White)는 그렇게 오늘도 그 자리에서 소리 없이 외치고 있다. 그림은 존재한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아이고 뭐더라 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