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가본드 Dec 10. 2023

편견은 나의 것, 설명은 너의 것

사랑할 수 없게 만드는

15년쯤 됐어요. 지금과는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죠. 직장에서 글쓰기 모임을 만든다는 공지가 떠서 가 봤죠. 첫 모임을 가졌는데 자기소개를 시키는 거예요.


그때 저는 공학도 출신의 연구원이었는데, 지금도 그렇듯 그때도 딱히 저에 대해 말할 것도 없었고 TMI를 주절주절 늘어놓을 필요도 없는 자리라고 봤어요. 그냥 우리 회사 어느 부서에서 어떤 일을 하는 누구라고. 이렇게만 말했죠. 그랬더니 글쓰기 모임의 장께서 의아한 표정(아래 그림과 정확히 똑같은 표정)으로 물으시네요.


"연구원이 왜 글을 쓰세요?"

딱 이랬어요, 그때 그분의 표정이.

저는 대답했어요. "글쓰기가 좋아서요." 그런데 그걸로는 모자랐던 걸까요. "글쓰기 코칭은 받으셨어요?"가 그 다음 물음이네요.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글쓰기에 부적합' 이게 저의 기본값이 된 상태에서 글쓰기를 원하는 이유를 해명하고 있는 그 상황 자체가 싫었어요. 저는 어디서 무엇을 하든 글쓰기가 필요하지 않은 인생은 없다고 생각했고 글쓰기 모임에 자기 발로 나온다는 그 하나로 글쓰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거죠. 하지만 모두가 저랑 생각이 같지는 않았나 봐요.


그 글쓰기 모임에는 그 한 번을 끝으로 더 나가지 않았어요. 그 후에도 글쓰기에서는 늘 제가 학부와 석사 때 전공(그게 도대체 언제 일인데...)과 과거에 가졌던 직업이 마치 주홍글씨처럼 따라다녔고, 심지어 여럿이 돌아가며 사내 소식지에 에세이 릴레이 참가를 희망했다가 전공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제된 적도 있어요. 이밖에도 어디 가서 취미로 글쓰기를 한다면 "응?" 하는 시선을 받기 일쑤였는데 그게 싫어서 이젠 어디서도 글 쓴다고 안 해요. 지인, 친지, 심지어 가족도 몰라요. 제가 글 쓰는 배가본드로 은밀히 존재할 수 있는 건 오직 브런치뿐이지요. 그런 시선이 돌아오지 않는 단 하나의 예외가 브런치니까요.




글쓰기 외에도 비슷한 일이 여러 번 있었어요. 무슨 일을 한다 하면 제 이력을 대충 아는 사람이 "아니, 그런데 왜 그 일을 해요?"라고 묻고, 제대로 답하려면 너무 긴 얘기를 해야 하고 줄이자니 너무 안 맞는 말이 되어 어색한 무응답을 택했던 경험, 혈액형이나 MBTI를 말하는 순간 저 아닌 것이 저로 의제되고 그게 그렇지 않음을 제가 입증해야 하는 경험, 어느 학교를 나왔냐는 물음에 대답하자 "대학 때 좀 놀았겠네?"라는 말이 되돌아온 황당한 경험, 기혼자가 아니라고 말하면 그 사실 자체를 어쩐지 이상하게 생각하는 듯한 경험 등. 귀에서는 소리가 들려요. 사브작 사브작 편견이 만들어지는 소리죠. 아 글쎄 들린다니까요!


저에 대해서 뭔가 말하는 순간 저에 대한 편견이 생겨나요. 그렇다고 저에 대해 많이 말하면 편견이 줄어드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오히려 편견의 가짓수만 많아지던데요. 결국 어이없게도 제 선택은 되도록 저를 보여주지 않는 게 되었죠. '편견은 나의 것, 설명은 너의 것' 이게 되는 상황에 지쳐서요.


"신비주의냐?" 이 말을 들을 때도 있지만 속 모르는 소리죠. 차라리 상대가 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지언정 제가 맞서야 할 편견을 만들기는 더욱 싫어서요. 단순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떳떳하면 왜 자신에 대해 말하지 못하느냐?"라고 말하지만, 사람이 자기에 대해 뭔가를 말하지 않는 건 부끄럽거나 뭔가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그로 인해 생겨날 편견이 싫어서, 그 이유일 때가 훨씬 더 많다는 걸 저는 알아요.




전 크리스천은 아니지만, 성경을 보면 이런 말이 있어요. 모세가 그분께 물어요. "당신은 누구이십니까?" 그분의 대답은 "나는 나인 나다(I am who I am)". 그런데 누가 저한테 그러네요. 그분은 신이니 그렇지 너마저 그러면 그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질문에 대한 회피라고. 그건 논리학에서 말하는 순환논증의 오류라고. 세상 어느 누구도 관계를 떠나 정의될 수 없다고.


순환뭐뭐인지 찌랄인지 무식해서 그런 것 모르겠고요. 누구도 관계를 떠나 정의될 수 없다는 말은 받아들이기 어려워요. 그게 되니 사람 아닌가요. 누구를 부를 땐 그냥 이름을 부르면 안되나요. 조선시대에는 사람 이름을 부르면 귀신이 달라붙는다고 꺼렸다지만 아직도 여성들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왜 '○○이 엄마'일까요. 엄마의 역할만 남고 그 사람은 어디 갔나요. 이름 짓는 데 음양오행 어쩌고 한자 획수까지 세며 길흉을 따지며 그렇게 애쓰는 나라도 없던데 정작 지어 놓고 부르지도 않을 거면 뒀다가 찌개나 끓여 먹으려 하나요. 어떻게 이렇게 맥락도 일관성도 없을까요.


저의 앞에 수식어를 붙이는 걸 별로 안 좋아해요. 수식어는 한정사라고도 하죠. 제 앞에 한정사가 붙는 순간 남들의 시선에서는 그 안에서만 살아야 하는 걸로 한정되고 아주 나쁘게 말하면 솔잎만 먹는 송충이가 되어서요. '○○였던 배가본드' 말고, '□□인 배가본드' 말고, '◎◎를 하는 배가본드' 말고, 그냥 배가본드면 좋겠어요. 뭐든 붙을 수 있지만 아무것도 붙지 않은 상태, 그 상태가 제일 좋아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시인으로 등단한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할 때, 시인 누구. 이러자니 에세이를 쓰거나 평론을 쓰는 모습을 나도 모르게 배제해 버릴까봐 시인인 누구라고 말하지 못하고, 에세이스트인 누구. 이러자니 그가 시를 쓰거나 평론을 쓰는 모습을 나도 모르게 배제해 버릴까봐 에세이스트인 누구라고 말하지 못하고, 결국 아무 말도 붙이지 못하는 거. 누구나 수많은 면을 가지고 있는데 한 사람의 특정 부분에 주목하는 순간부터 의도치 않게 그 사람을 한정해 버릴까봐. 타인의 이름 앞에 무슨 한정사를 놓는 게 제겐 늘 쉽지 않은 건 그 때문이에요.

<오만과 편견>에 이런 말이 나와요. "오만은 상대가 나를 사랑할 수 없게 하고, 편견은 내가 상대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런데 우리가 사람에 대해 잘 알려고 만든 것들 상당수가 그 사람에 대해 도리어 편견을 갖게 하는 도구로 전락할 때가 많잖아요. 덤으로 '내가 너를 잘 안다'라는 착각도 함께.


MBTI도 그렇죠. 원래는 사람을 더 잘 이해하려고 만들어진 거지만 현실에서 MBTI를 묻는 건 거의 머릿속에서 상대를 빠르게 해치워버리기 위해서잖아요. 빨리 정리하고 규정해서 더 이상 생각하고 관찰할 필요 없는 존재로 고정할 때. 그러니까 '아, 직관을 중시하고 내향적인 사람이군.' 이렇게 정리해 버리고는 그에 대해 더는 깊이 생각지 않는 거죠. 그리고 앞으로 그 사람의 모든 행동과 말은 그런 분류 안에서 반복되는 무의미한 사례에 지나지 않는 거죠.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의 디테일이 궁금해지죠. MBTI는 오히려 그게 더 궁금하지 않게 만들어요. MBTI는 상대에 대한 사랑과는 대척점 근처 어디쯤 존재하는 셈이죠. 누군가를 좋아할 때 제가 궁금한 건 그 사람의 MBTI가 아니라 그 사람이 요즘 어떤 책을 읽고, 어제 몇 시에 잤고, 오늘 점심엔 뭘 먹었고, 내일은 어디에 가 보고 싶어 하는지. 그런 디테일들이에요. MBTI를 꼭 써야만 하겠다면, 차라리 그런 디테일에 다가가기 위한 징검다리로라면 어떨까요.


여러 가지 이유로, 누군가와 너무 가까워지는 걸 꺼려요. 5가지 정도 이유가 있는데, 그중에 상대가 나를 자신이 실제로 아는 것 이상으로 잘 안다고 착각하는 게 싫어서. 우습게도 그 이유가 있어요. 하지만 누군가와 아무리 가까워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누군가와 아무리 가까워도 그를 다 알진 못함을 전제하는 사람이라면, 누군가를 100% 알 수는 없어도 그를 사랑하는 건 가능함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이라면 마음을 활짝 열고 저를 한껏 보여주며 살고 싶어요. 어쩌면 저도 모르게 한없이 귀여워질지도 모르고요.

작가의 이전글 일 년 뒤에도, 또 일 년 뒤에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