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내 베프는 성이 전, 이름이 우병이었다. 공부도 나보다 잘하고 뭐든지 나보다 나으니 그야말로 롤모델이었다. 게다가 이름마저 전우병! 꼭 무슨 코만도를 연상케 하는 행성파괴급으로 멋있는 이 이름은 무엇? 그 친구의 모든 게 다 탐났다.
우병이는 특이하게도 물 대신 우유를 마셨다. 물을 마시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피자도 우유랑 먹으며, 심지어 밥도 우유에 말아먹었다. 하루에 마시는 우유만 2리터는 되겠는데. 모든 면에서 우병이처럼 되고 싶었다. 따라 했다. 맹장이 뒤틀리고 죽을 것 같다. 이씨 그래도 난 해낼 거야. 맨날 우유만 사다 날랐다. 왜 그러냐고 어머니가 물으셨다. 우병이가 그러던데요! 그랬더니 어머니 왈, 그럼 우병이가 죽으면 따라 죽을래?
미라클 모닝을 시도했다. 기적이 일어났다.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이 고장 난 것이다. 어쩌다 한두 군데 아팠던 적은 있어도 그렇게 여러 곳이 동시다발적으로 고장 났던 적이 없다. 아픈 데가 하도 많으니 어디가 아픈 건지도 모르겠다. 건강진단을 받으니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 따로 없었다. 그 기간 매일 두드려 맞아도 이보단 낫겠다. 그 짧은 기간 동안 몸이 그렇게 기적적으로 망가진 적이 없었으니 어쨌든 미라클은 미라클이다.
■ 첫 번째 미라클 모닝 실패기
오래전. 첫 직장 신입사원 연수. 그 회사는 7-to-4 제도 도입으로 유명했는데 신입사원 합숙연수도 7시에 시작해서 4시에 끝나는 일정이었다. 그러려면 5시 기상해서 운동장 구보, 6시까지 조식, 7시까지 교육장에 모여야 한다. 이 연수과정 이름이 VCC(Vision Creation Course, 비전창조과정)였는데 레크리에이션 시간에 VCC로 3행시 짓기를 시켜서 부시시라 했다가 엄청 혼나고 이후 부시시는 연수원에서 금지어가 됐다. 부시시가 비표준어라서 그랬던 거라고 열심히 정신승리했다.
나는 슬로스타터이다. 아침에 일찍 눈을 떠도 장기는 몇 시간 후에야 천천히 깨어난다. 그 상태에서 깨어나지도 않은 내장에 음식물을 투하하는 건 내겐 고통이다. 합숙 연수가 끝나고도 후유증이 오래갔다. 복통, 현기증, 만성피로... 좀 더 하면 적응되겠지, 참자. 견디자. 하지만 건강은 날이 갈수록 나빠졌다. 건강진단에서 비알콜성 지방간이란다. 콜레스테롤 수치도 높고 혈압도 좋지 않단다. 심장에 이상이 느껴지고 손도 떨렸다. 너무도 묻고 싶었다. 대체 제 몸에 정상인 곳은 어딥니까?
■ 두 번째 미라클 모닝 실패기
3년 전. 현재 직장. 새로 부임해 오신 추장님은 미라클 모닝 예찬론자였다. 부임 첫날 각 팀들을 순서대로 불러서 '고충 수렴'의 목적으로 면담을 했는데, 말이 좋아서 고충수렴이지 그냥 차례대로 들어가서 강의 들으며 테이블 무늬연구하다 나오기다.
그날따라 유난히 내가 인생을 지루하게 느꼈던 걸까. 내겐 어릴 때부터 침으로 버블(방울)을 만들어 날리는 버릇이 있었는데, 공무원 되고 한동안은 그 버릇이 튀어나온 적은 없었다. 딱 한 번, 내가 신규공무원 교육 강사로 들어갔을 때 교육생들이 보여달래서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스테이지에서 시범을 보인 그 한 번 빼고. 그런데 내가 열강 하는 추장님 바로 앞에 앉아 침으로 버블을 만들어 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공중에 두둥실 떠오른 버블이 하늘하늘 춤추며 추장님의 까만 명패에 깃털처럼 살포시 내려앉아 상큼하게 탁 터지는 풍경을 목도하고서야 도대체 내가 뭔 짓을 한 건가 싶어 으윽 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다행히 추장님은 미라클 모닝 효능 열창에 온 신경을 집중하시느라 그 광경을 보지 못하셨지만 순간 심장이 어찌나 쫄깃하던지 말이다.
모든 팀들이 돌아가며 면담을 마치고, 그의 부임 첫 지시가 떨어진다. 내일부터 전 직원 미라클 모닝 실시! 단톡방에 전원 4시 반에 기상인증! 목적은 직원들의 건강 증진! 이유불문하고 열외 없음!
며칠 후, 나는 코로나 확진자 수용시설에 차출되어 파견을 갔다. 보통 새벽 2시까지 일하고 숙소에 들어오면 기상인증을 하려고 4시 반까지 참거나, 알람 맞추고 4시 반에 기상인증하려고 일어나야 하니 환장할 노릇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난 그래도 나은 거더군. 새벽까지 아기와 사투를 벌이다 3시에 아기를 간신히 재워 놓곤 4시 반 기다리며 잠 못 드는 워킹맘 H는 어쩌면 좋을까. 의회 업무 담당하며 제출자료 준비한다고 어제 자정 넘도록 야근하다 2시에 집에 가서 다음날 아침 7시에 나와야 하는 J는 또 어쩜 좋을까. 새벽이 오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세상 모든 닭이란 닭의 목을 죄다 비틀어 버리고 싶지만 4시 반은 결국 오고야 만다. 단톡방이 울렸다. 추장님이다. "모두 좋은 아침!" 그렇게 모두 좋은 아침을 강요당했다.
■ 그리고 예전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때. 수험정보를 얻으려고 인터넷 카페에 가입했다. 회원 수는 18만 명이었지만 주로 보이는 사람들이 정해져 있었는데 댓글 교환하다가 기상시간 논란이 있어서 댓글을 달았다. 전 새벽 5시 취침 12시 기상요. 그랬더니 대댓글. '님. 그러면 떨어져요.' '이건 좀 아닌 듯' '수험생 맞음? ㅋㅋㅋ' 그런데 참 기이했던 건, 나이트파는 누구를 설득하려 하지 않고 그게 옳다고도 주장하지 않고 단지 '전 이래요'에 그치는데 상당수 모닝파는 나이트파에게 이런 식이더라는 것이다.
조용히 카페를 나왔다. 마지막 댓글은 마음속에 썼다. 다 똑같은 입장에서 너 그러면 되네 안되네 이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저는 이 싸움에서 조용히 물러설게요. 지금 이걸로 겨루지 말고 그날 겨뤄요. 님들이 님들의 방식대로 준비하신 거 그날 다 하세요. 저도 제 방식으로 준비해 와서 제가 준비한 거 다 할게요. 저는 시험 다 끝나고 결과 나오고 난 후에 다시 올게요. 그때 뵐 수 있음 뵈어요.
■ 이런 시댕, 난 시퐈라고
GOT7의 멤버인 뱀뱀은 태국인이다. 그 뱀뱀이 한국말 '빨강'이 입에 붙질 않아서 자기도 모르게 '시댕'이라고 태국말이 튀어나왔다. 태국말로 빨강은 '시댕'이다. 파랑은 '시퐈'고.
내 색은 파랑인데, 나에게 줄창 빨강을 말한다. 받아들여도 보라인데 여전히 빨강이 아니니 틀렸다 한다. 나는 파랑이 맞다 한 적이 없는데, 너도나도 내 파랑 위에 저마다의 색을 풀어놓는다. 세상의 모든 색을 받아들여 검정이 될 판이다. 난 시퐈야. 그렇겐 못해. 그러니 날더러 고집이 세단다. 나 이거 참, 내 일을 내 원대로 하려는 게 고집스러운 건가, 남의 일을 자신의 원대로 하려는 게 고집스러운 건가? 난 파랑으로 바다를 그릴 건데 진리의 빨강을 들이부어 피바다를 만들려 하네. 아니 이 시댕! 내가 그리고 싶은 바다는 이거라고, 시퐈!
■ 미라클 모닝 말고, 미라클 라이프
기적은 정말 아침에만 존재할까. 미라클은 왜 모닝에만 붙을까. 미라클 나이트일 수는 없을까. 아예 미라클 미드나잇일 수는 없을까. 실제로 나는 그 시간에 꽤 많은 일들을 하고, 어떨 땐 제법 괜찮은 일을 할 때도 있다. 어째 오늘은 글이 조금 잘됐네 싶으면 그건 모두 밤이었다. 아침과 밤이 호르몬이 달라서인지는 모르겠는데, 저녁은 어쩐지 감성의 시간인 듯하고 아침은 그에 비하면 이성의 시간인 듯하다. 여가 시간에 감성적 활동을 많이 하는 사람은 밤에 책을 읽는 것도 나쁘지 않다. 새벽에는 출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압박감 때문인지 이 시간대의 감성적 활동은 내 경우는 밤보다 못하다.
한 사람을 안다. 그의 취침 시간은 보통 새벽 3~4시, 기상은 보통 11~12시. 일부 미라클 모닝 신봉자들은 건강에 안 좋고 능률도 떨어질 거라며 고개를 저을 테지만 실제로는 그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 신체를 가졌고, 누구보다 건강하며, 많은 일을 하며, 하루를 밀도 있게 쓴다. 그의 생산활동은 거의 밤에 이루어지고, 누구보다 훌륭한 것을 만들어낸다. 모닝이냐 나이트냐 이전에 그는 자신의 매뉴얼을 알 뿐이다.
미라클 모닝을 권하는 이들의 이유들 중에 '그게 대세라서'가 있다. 이 대세라는 말이 영 마뜩잖다. 대세는 합류하지 않으면 낙오라는 뜻을 품고 있다. '나 미라클 모닝 해요' 하면 홧쇼나불(fashionable)하기라도 한 걸까. 일부 미라클 모닝 예찬자들은 그 자체로 뭔가 위대한 것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중독된 건 아닐까.
대세에 눌려 목소리를 못 낼 뿐 미라클 모닝이 있으면 미라클 나이트도 얼마든지 있다. 핵심은 모닝이냐 나이트냐가 아니라 주도적인 삶 아닐까. 개인에게 최적화된 루틴이 정착되고 체화되었을 때, 그거야말로 진짜 미라클 아닐까. 비록 나에겐 미라클 모닝은 없지만 미라클 라이프는 존재할 것이다. 내가 아는 그에게도.
한국사회에서 말하는 실패는 이상하게도 '시간'과 관련된 것들이 많다. 세상이 그 모든 것을 일률적으로 분류하며 성공 실패를 갈라치기하는 심판관이 될 게 아니라 그 다양한 페이스를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무대가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만들어갈 문화도 그런 다양한 시간들이 존중받을 수 있는 이야기들로 채워졌으면 좋겠다.
"배가본드야, 요즘 미라클모닝이 대세야. 일론 머스크도 미라클모닝 한다잖아."
"그럼 일론 머스크가 죽으면 따라 죽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