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새 학년 첫날. 무슨 종이를 나눠준다.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버지 직업, 어머니 직업을 쓰는 칸이 있었고, 장래희망을 쓰라는 칸도 있었는데 다들 쉽게 적는 그것 하나가 내겐 채우기 어려웠다.
그 일이 있기 한 해 전의 새 학년 첫날에도 똑같은 걸 물었던 듯하다. 그땐 호떡이나 실컷 먹고 싶어서 호떡장수라고 했더니 '호떡장사 차려서 네가 다 먹게?'라는 말이 돌아왔다. 다들 나를 보고 깔깔 웃는 상황이 싫어서 그 하나를 빼자니 통 쓸 게 없었다.
옆의 애는 판사 쓴다. 난 판사가 뭔지 모른다.
앞의 애는 검사 쓴다. 난 신체검사밖에 모른다.
뒤의 애는 의사 쓴다. 난 병원 무서워서 싫은데.
뭐라도 써야 했으니 한참 생각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빈칸에 대문짝만 하게 두 글자를 써넣었다.
그랬더니 그날 수업이 끝나고 교무실로 조용히 내려오라는 것이다. 뭔가 대단히 잘못된 느낌에 바짝 쫄아서 내려가니 선생님이 2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시퍼런 몽둥이를 들고는 눈을 부릅뜨고 나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머리털 나고 본 몽둥이 중에 제일 살벌했다. 한 대만 맞으면 그야말로 팔다리가 뎅겅 부러지며 뼈다귀도 없이 소멸해 버릴 것만 같았다(진짜).
걷기는커녕 기지도 못할 정도로 뒈지도록 뚜드려 맞고는 울려는 얼굴로 교무실을 엉금엉금 네 발로 기어 나오던 그때 나의 모습을 재연하면 딱 이랬다.
내가 그때 무슨 남다른 깊은 생각이 있어서 그랬던 게 아니다. 단지 귀찮았을 뿐이고, 고민하기 싫었을 뿐이고, 뭐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대답하는 방법을 몰랐을 뿐이다. 어릴 때는 나름의 꿈이 있어야 할 텐데 그게 없었으니 억울할 것도 없다(뭔가 쓰긴 했지만 실제로 아무 뜻도 들어 있지 않았던 거 맞잖냐, 배가본드야).
이제는 나에게 그걸 묻는 사람은 없다. 어른이 되면서 삶은 원대로 되지 않음을 모두가 알아서일까. 꿈이라면 그 전에 이미 이루었어야 하고 아직까지도 꿈이란 게 있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다고 생각해서일까. 나에겐 꿈이 있다고 말하자니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꿈일까 하는 시선이 의식될 때는, 어쩌면 꿈과 어른은 양립할 수 없는 말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린 저마다 순간순간을 살아 내며 사회에서 맡은 역할을 하려 했을 뿐인데, 어쩌다 변변한 꿈조차도 없게 되고 만 걸까.
행복해? 고장 난 신호등 대신해서 허우적거리고, 매연 냄새에 찌들어 가는 게 행복하냐고. 아 물론 인정해. 사람은 누구나 제각각이라서 돈이 최고인 사람, 김치 한 조각에 밥만 먹어도 되는 사람, 그 돈 다 모아서 에티오피아 난민한테 보내 놔야 다리 뻗고 자는 사람, 다양하지. 옳고 그를 거는 없어. 다 자기 가치에 따라서 살뿐이야. 그래서 넌, 네 가치에 따라, 지금 이 순간, 행복하냐고.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 中)
어느 때부터인지, 왜 사는지 자꾸만 내게 묻게 된다. 처음에는 너무 늦은 생각 아닐까 싶었지만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모든 궁금증에는 그게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때가 있고 나에게는 그때가 지금일 뿐이다. 어릴 때처럼 '무엇을?'보다는 '왜?' '어떻게?'를 고민하며 살고 싶다. 세상이 정해 놓은 가치 말고 내 가치를 따라 살고 싶다. 무엇이든 몰입해서 삶이 생기 있게 만드는 뭔가를 갖고 싶다. 그렇게 평생을 사람이고 싶다.
어쩌면 꿈은 이뤄서 행복한 게 아니라 갖고 있어서 행복한 걸지도 모른다. 지구에 중력이 있는 한 몸은 쭈글쭈글 늙고 살은 처지게 되어 있지만, 중력 때문에 꿈까지 내려놓아야 할 것 같진 않다.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꿈이 있는 것처럼 어른에게는 어른의 꿈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어른에게는 뭔가 이루고 끝나는 꿈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실천하며 사는 꿈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내게도 한때는 꿈이 있었지'가 아니라, 지금도 나에게는 꿈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게 뭐냐고 누가 나에게 물으면, 나지막이 대답하고 싶다.
사람.
판사는 내가 못 되어도 누가 대신되어 준다.
검사는 내가 못 되어도 누가 대신되어 준다.
의사는 내가 못 되어도 누가 대신되어 준다.
하지만
사람은 내가 못 된다고 누가 대신되어 주지 않는다.
내가 못 되면 그저 한 명의 사람이 줄어들 뿐.
그때는 고민하기 싫어 사람이고 싶었고
지금은 아무런 고민 없이 사람이고 싶다.
그때는 빈칸을 채우고 싶어 사람이고 싶었고
지금은 하나를 보태고 싶어 사람이고 싶다.
그래도 사람이고
그래서 사람이다.
나의 장래희망은
아직도 '사람'이다.
< 글 쓰는 가을밤, 촛불이 되어 준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