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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가본드 Feb 21. 2023

나의 물음에 답해주세요

학교 다닐 때 무슨 과목이 제일 좋았어요.


그는 물었다. 대답하지 못했다. 떠오르는 게 없었다. 기억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정말 없었다. 그가 만약 뭐가 제일 싫었는지 물었어도 대답하지 못했을 것 같다. 모든 과목이 저마다의 이유로 싫었으니까. 그랬으니까.



■ 국 어

선생님이 인기는 [인끼]로 읽는다고 하자 "선생님, 강인구(선생님의 존함)는 왜 강인꾸가 아니에요?" 그랬다가 앞으로 나오라고 해서 다 보는 데서 맞았지만 강인구는 왜 강인꾸가 아닌지 알려주는 이는 끝끝내 없었고, 그날 이후 국어는 쳐다보기도 싫었다.


■ 한 자

수풀 림(林) 자를 쓰면서 두 개의 나무 목(木) 자로 공중분해됐다는 이유로 꿀밤을 세게 맞은 날 이후로 한자는 쳐다보기도 싫었다.


■ 영 어

잘하면 좋긴 할 테지만, 만인이 다 잘해야만 하는 이유는 뭘까? 국민의 영어 실력이 그 나라의 경쟁력이라는 말에도 동의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 내가 영어 32점 받고 집에서 쫓겨나던 찐따였다는 사실이다. 이런 내가 뭐라고 꽥꽥 떠들면 참으로 퍽도 다들 귀담아듣겠지. 그러니 나 말고 영어 잘하는 애들이 이런 말을 좀 해 주길 바랐는데 걔들은 공부하기에 바빠서인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더군.


■ 수 학

내가 공대를 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내가 당연히 수학을 좋아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닌데. 수학 좋아하는 애들한테 물어보면 "수학은 답이 하나뿐이니까"라고 하던데 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수학이 싫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수도 0으로는 나눌 수 없다'에 "왜요?" 했다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좀!" 이 말이 돌아온 그날 이후는 전부터 싫던 수학이 더 싫어졌다.

이씨 너마저 이러면 어떡하니?

■ 국 사

'조선시대는 학문이 융성하고 사상이 발달한 민족 문화의 황금기이다.'라는 문장에 발목이 잡혔다. 황금기? 그런데 사람들 사는 모습은 왜 그랬을까? 기껏 농사 지어 놓으면 다 뺏기고는 그것도 모자라서 말도 안 되는 온갖 잡세로 이중 삼중으로 수탈당하는 게 일인데 성리학이니 사림파니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구석기시대에는 바위그늘이나 동굴에서 생활하며 수렵, 채집, 어로 활동을 했다는데 그거야말로 나의 로망인데! 시대를 골라 다시 태어난다면 언제로 할 거냐 물으면 많은 사람들은 구석기시대를 말하지 않을까? 왜 구석기시대가 아닌 조선시대가 황금기라는 것인가? 장난을 치려거나 공부하기 싫은 게 아니라 진짜로 심각하게 궁금했다. 하지만 그걸 물었다간 '저 또라이 색퀴 또 시작이네' 정도의 피드백이 아주 높은 확률로 예상되었기에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것조차 '왜'를 묻지 못하면 국사는 '왜' 공부하는가? 이 모든 걸 묻지 못하는 나 자신이 싫고 + 묻지 못하는 상황 자체가 싫고 + 국사 자체도 덩달아 싫어졌다.

그래, 바로 이거라니까.

■ 미 술

그냥 못해서 싫었다.


■ 다시 수학

"원의 둘레는 줄자 없이 잴 수 없고 지름에 원주율 파이(π)를 곱해서 구한다"라는 설영을 듣고는 이상한 의문이 생겼다. 줄자 없이 잴 수 없다고? 원을 한 바퀴 뱅글 굴리고 그게 앞으로 나간 만큼이 원둘레는 아닐까? 이 생각이 맞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왜요?" 했다가 결과가 좋지 않았던 수많은 기억 때문에 그걸 묻지 못했다. 보통 이럴 때 돌아오던 말은 "너, 그러면 못 따라간다."였으니까. 그전에도 싫은 이유가 여럿 있었는데 어느 때부터 '왜'를 묻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더해지니 수학은 '싫다'를 넘어 '가장 싫다'가 되어 버렸다.

이거 아니야?

경주마처럼 달려 남들보다 먼저 특정 상태에 도달할 것을 요구하던 교육이 내게 남겨 준 것은 좋아하는 과목이 하나도 남아나지 않은 상태였다. '왜?'하고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거의 "쓸데없는 거 궁금해하지 말고 하라는 공부나 잘해"였다. 하라는 공부 말고는 그냥 다 쓸데없는 궁금증이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접경에 있는 것을 아는 것의 영역으로 포섭하려면 내겐 늘 왜가 필요했지만 궁금증에도 허락되는 범위가 있음을 느낀 후로는 각 과목들은 도미노처럼 줄줄이 '싫은 과목'이 되어 갔다.


어쩌면 누군가는 내게 '좋아할 이유를 만들어야지 왜 자꾸 싫어할 이유만 만드느냐' '무언가를 좋아할 이유는 가만히 있으면 찾아오는 게 아니라 당신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를 지적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수많은 질문들에 모두 답을 주진 못하더라도 이건 왜 공부하며 저건 왜 공부하는지 그것만이라도 누가 속시원히 말해 줬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어릴 때 무슨 과목이 좋았냐고 묻는 말에 지금의 내가 최소한 하나는 대답할 수 있지 않았을까. 수학은 왜 공부하냐고 물으면 '수학 잘하면 딴 것도 절로 잘 해진다'라는 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영어는 왜 공부하냐고 물으면 '그럴 시간 있으면 단어 하나 더 외우라'라는 말이 돌아올 뿐이었다. 해야 한다니 억지로 하긴 했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공부를 마칠 때까지 내가 이걸 왜 공부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젠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지만 아직도 그게 아쉽다.




연구원으로 살아가던 때, 신모델 개발에 기여한 팀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회장님이 대형 친필 액자를 하사하신 적이 있다. "技術만이 人間을 幸福하게 한다" 이건 인간이 행복하려면 기술 말고는 다 쓸모없다는 말이 되는데 모두가 그 액자를 들고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려 열광하는 모습을 촬영하던(정확히는 '해야만 하던') 그 와중에 '왜?'가 궁금했던 게 나만은 아니었으리라. 그러나 아무도 서로에게 묻지 못했다. 그 상황도 상황이지만 그런 상황에 길들여져 가는 나 자신이 싫었다. 연애가 깨질 때도 상대가 미워서보단 상대와 함께일 때의 내 모습이 싫어서이듯 조직에 소속된다는 것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조직이 이렇다 저렇다 하기 이전에 그 안에서의 내 모습이 싫어 조용히 떠났다.


공무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지금도 뭔가 해야 할 일이 새로 생겼을 때 이걸 하는 이유가 뭔지 조심스레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보통 "○○님의 말씀이시다"이고(그건 나도 알아), "하기 싫어?"일 때도 있다(AI면 '제정신입니까, 휴먼?' 했을까?). 하지만 내가 왜를 묻는 건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걸 알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런 상태를 원해서일 뿐이다. 내가 이걸 왜 하는지도 모르는 채 일하는 상태, 못하는 것보다도 더 못한 그 상태를 원하지 않을 뿐이다.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며칠 전에는 브런치를 접속하는데 내가 로봇이 아님을 증명하란다. 16개의 타일 중에서 신호등이 있는 타일을 고르란다. 툭하면 이런 요구를 받을 때는 어차피 너도 로봇이면서 내가 네놈한테 왜 로봇 아님을 밝혀야 하는지 화가 버럭 나다가, 결국 내가 실은 로봇인데 그걸 나만 모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른다.

신호등을 사색하자, 신호등을.

신호등의 기둥은 신호등일까 아닐까? 기둥 없으면 신호등은 역할을 할 수 없으니 기둥도 신호등의 일부인데. 아니 기둥만 있으면 그 자체로 신호등 구실을 못하니 신호등 아닌데. 그렇게 한참 동안 신호등을 사색하다가 이것저것 타일을 선택하니 네놈은 인간도 아니란다. 알파고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구나. 내가 하는 모든 것에서 '왜?'를 묻지 못하니 로봇 맞네. 학창 시절뿐 아니라 엔지니어던 때도, 공무원인 지금도.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앞에서 이끄는 교육보다는 기다려 주는 교육을 원한다. 선생님과 학생이 '왜?'를 같이 고민하며 함께 커 가는 교육을 원한다. 선생님이 한 번도 고민하지 않은 왜를 물은 학생의 궁금증을 품는 교육을 원한다. '해야 한다' 하나만 남기고 무수한 '왜'를 가슴속에 묻어야만 했던 그때의 나와 같은 불행한 학생은 정말 다시는 나와선 안된다.


세상에 왜가 적은 것 같진 않다. 하지만 "넌 왜 결혼도 안 하니?" "쟤는 결혼한 지가 꽤 됐는데 왜 애를 안 낳니?" "너는 왜 골프를 안 치니?" "왜 직장에서 저녁 먹고 퇴근 안 하고 집에 가서 먹니?" 이런 왜뿐이다. '정답 사회에서 너의 오답을 심사해 주겠으니 이제 너의 오답을 내밀어 봐'를 한 글자로 줄인 그런 '왜'만 넘쳐난다. 우리를 로봇 아닌 사람으로 되돌려 주는 왜는 어디로 갔을까. 그 답을 알아서 공부든 일이든 훨씬 더 잘할 수 있게 해 주는 왜는 어디로 갔을까. 정작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진정 필요한 왜는 다들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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