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선선해지니 골프 치러 같이 가자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난다. 친척도, 동료도, 동창도 골프 치러 가자고 그렇게들 꼬셔 댄다.
"저는 골프는 안 치는데요..."라고 대답하면 눈빛이 묘해진다. 상대의 머리 위에 커다란 '?'가 뿅 뜨는 특유의 느낌이 있다. 그리고는 즉각 "아니, 왜?"가 날아온다. 경험이 없던 예전에는 나름의 이유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는데, 몇 번 이러다 보니 어떻게 대답해도 상대방의 다음 말은 어차피 똑같다는 걸 알았다. 하긴 그건 애초에 왜가 아니라 '왜어택'이었으니.
< 왜어택™ (why-attack) >
그냥 '왜?'와는 달리 '왜어택™'은 <나=기본값, 너=소명 필요>라는 생각을 깔고 있다. 단지 궁금해서보다는 '내가 반박해 줄 테니 너의 답을 한번 내밀어 봐'에 더 가깝다. 겉모양은 똑같은 '왜?'이지만 그게 그냥 왜인지 왜어택™인지는 그 순간의 느낌과 묻는 사람의 표정으로 거의 알 수 있다.
(※검색하지 마세요. 어디에도 안 나와요 :P)
너는 왜 골프를 안 치냐? 이 물음에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어떻게 대답하든 즉각적인 반박에 직면하고 결론은 늘 "구차하게 변명하지 말고 일단 좀 해 봐! 내가 장담해, 분명 좋아진다니까!"였다. 자꾸만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하루는 대답을 바꿔 봤다.
??? : 그런데 너는 골프 안 치나?
배가본드 : 안 친다.
??? : 왜? (왜어택™)
배가본드 : 왜놈이 잡아가니까.
??? : (띠용) 이런, 예라이...
상대의 머릿속을 텅 비게 만들어 대화를 교란하기! 실제로 대화는 거기서 전혀 진전되지 못하고 땡땡 끝나 버렸다. 다분히 레트로 감성이지만 어쨌든 성공했다!...라고 생각했는데 며칠 뒤에 또다시 골프로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구석에서 조용히 멍 때리는 나를 흘끔 보더니 또 시작이다. "아니 그런데, 너는 참 신기하다. 골프 안 치고 뭔 재미로 사냐?"
한 번 써먹은 거 또 써먹긴 좀 그렇고 미소로 뭉갤 수밖에 없군. 이렇게 되니 이어지는 말은 "그래서, 취미가 뭔데?"이다. 글쓰기라고 대답하긴 좀 그렇고(이것마저 하찮게 취급해 버리면 너무 아플 것 같아서), 두 번째 취미인 수영으로 대답하니 "에이, 탁 트인 필드 나가야 가슴이 뻥 뚫리지, 코딱지만 한 수영장에서 왔다리 갔다리 배비작 배비작 하면 뭐 재밌냐?" 이게 되고 만다.
그런데 말이다. 당신의 코딱지는 그렇게 크지 않다. 기껏해야 1mm×1mm×1mm 정도에 불과한 인간의 코딱지를 가지고 25m(길이)×10m(폭)×1.5m(수심)의 수영장 풀을 가득 채우려면 자그마치 3,750억 개의 코딱지가 필요하고, 백골이 되도록 식음을 전폐하고 코딱지만 파도 턱도 없고 영겁의 세월이 흘러 지구가 수명을 다하고 자연 소멸하는 날까지 후비적 후비적 해도 될까 말까다.
이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골프 예찬으로 넘어간다. 골프만큼 심신에 좋은 게 없다는 말, 사회생활 잘 하려면 골프는 필수라는 말, 사람을 파악하려면 골프를 같이 쳐 보면 된다는 말, 심지어 골프에 인생이 있다는 말까지, 온갖 관점의 상찬을 총동원한 이 모든 장광설을 토해 내야 대화가 끝난다. 결국 '너는 뭘 몰라서 그래'가 되고, 이 과정에서 "골프도 안 치면 사회생활 힘들 텐데?"나 "방에서 혼자 글쓰면 좋은 게 있냐?" 등등 이게 도대체 충고인지 비난인지 모를 말도 심심찮게 듣게 된다.
내겐 너무나 익숙한 대화의 흐름이다.
나는 그들의 선의를 이해한다. 그들은 단지 좋은 걸 나누고 싶을 뿐이다. 원래 뭔가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꽂혀 버리면 타인의 취미는 모조리 하찮게 보이고, 그 좋은 걸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 불쌍해 보이지 않을까? 자연스레 남들에게 알리고 싶어지고, 자기가 좋아하는 주제로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많이 할 수 있게 되면 즐겁지 않을까? 과몰입의 흔한 부작용일 뿐이고 그들의 잘못이라면 골프가 너무 좋았던 것뿐이다.
골프를 치지 않는 나의 이유도 작정하고 늘어놓으면 20개도 넘지만, 내가 그걸 아무리 애써 설명해도 논리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감정의 영역에 속하는 취향을 암만 논리적으로 설명해 봤자 나만의 논리이고 태생적으로 비논리이다. 그런데, 그건 그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골프를 안 치는 이유가 무슨 이유를 갖다 붙여도 논리적일 수 없는 것처럼, 반드시 골프를 쳐야 한다는 그들의 이유도 무엇이 됐든 태생적 한계상 논리적일 수가 없다.
감정은 어떤 경우에도 잘못될 수 없다. 좋든 싫든 저마다 그 자체로 무조건 옳다. 감정의 영역인 취향을 이성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가길 원하지 않는다. 한쪽은 골프가 왜 싫은지를 설명하고 다른 쪽은 골프가 왜 좋으며 왜 꼭 쳐야만 하는지를 설명하고 반박하는 그 상황 자체가 잘못이다. 그리고 둘은 서로 경합의 관계도 아니다. 애초에 태어날 이유가 없었던 이 무의미한 논쟁에서 조용히 물러서고 싶을 뿐이다.
이런 식의 문제는 골프 말고도 많다. 결혼을 안 하고 있는 사람에게 "너는 왜 결혼을 안 해?" 할 필요가 없고, 고기를 안 먹는 사람에게 "너는 왜 고기를 안 먹는데?" 할 필요가 없다. 저마다 이유가 있지만 무려 설명까지 할 일이 아니라서일 뿐, 말이 없다고 이유도 없는 건 아니다. 애초에 이성의 영역도 아니고 선택지 간에 무슨 우열이 있는 것도 아니다. 골프를 안 치는 사람이 골프 좋아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골프를 왜 치는 거요?"라고 하지 않듯, 그들도 골프를 안 치는 사람들에게 그 정도의 스탠스만 유지해 줄 수는 없을까. 왜야말로 이 세상 모든 진리 탐구의 출발점이라고는 하지만 모든 왜가 다 그런 건 아니다. 왜? 왜놈이 잡아가니까!
< 글 - 배가본드 그림 - www.pixabay.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