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족감이라는 이름의 허상, 플라시보 소비
매년 연말이면 다음 한 해의 소비 트렌드를 예측한다. 올해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는 ‘소확행’, 자신에게 선물하는 보상적 소비인 ‘자존감’, 그리고 플라시보 효과처럼 가격보다 심리적 만족이 중요한 ‘플라시보 소비’ 등이 제시되었다. 이에 백화점, 온라인 쇼핑몰, 그리고 동네 슈퍼마저 관련 상품을 내놓는다. 그리고 우리는 매년 이렇게 트렌드에 맞춰 소비를 한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행복하지 않다. 소비가 부족한 것인가?
해방과 전쟁으로 시작한 한국의 현대사. 찢어지게 가난했던 우리는 ‘허리띠 졸라매는’ 검소함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불황과 호황이 있었지만, 전반적인 소득수준은 올라가 중산층이 확대되었다. 그리고 무조건 싼 것을 구매하던 ‘알뜰소비’는 중간치 적당한 가격의 제품을 구매하는 ‘골디락스 Goldilocks' 소비로 바뀌게 된다. ‘먹고 살만해진’ 중산층이, 품질이 의심스러운 저가와 부담스러운 고가를 피해 평균적인 제품을 구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비사회는 개인의 '정체성'을 사회적 '개성'으로 치환하고, 그 과정에서 더 나은 소비를 통해서 개성을 표현할 것을 강요한다. 이에 더 나은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중산층의 욕망은 점점 커진다. 하여 그동안의 ‘중간소비’는 위아래로 분리되어, 비교적 저렴하면서도 감성적 만족을 주는 대중적 명품(masstige, 매스티지)을 구매하는 트레이딩업(trading up, 상향구매)과 동시에 실속을 위해 저렴한 제품을 구매하는 트레이딩다운(trading down, 하향구매)의 경향을 보이게 된다.
이후, 저성장 시대에는 ‘가격 대비 우수한 가치를 제공하는 제품’을 구매하는 합리적 성향을 보이는데, 이렇게 ‘저가와 양질이 공존’하는 것을 ‘가치소비’라 한다. 가치소비는 남을 의식하는 ‘과시소비’와는 달리 실용과 자기만족이 중요하고, 저렴하지만 자신의 가치에 부합해야 한다. 그리고 저성장을 지나 역성장의 시대에는 ‘가격 대비 성능’ 즉, ‘가성비(cost-effectiveness, 價性比)’가 좋은 것이 장땡이다.
하지만 소비사회에 조련된 우리는 제품에서 ‘기능’만을 원하지 않는다. 소비사회가 가르쳐 준 대로 소비를 통해 마음의 만족을 얻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이제 가성비에 ‘가격 대비 심리적 만족’을 의미하는 ‘가심비(價心比)’를 더해, 마음을 위로하는 ‘플라시보 소비’가 탄생하였다. 플라시보 소비는 그 자체로 쾌감이나 심리적 안정감을 주어 스트레스를 풀어준다. 다시 말해 불황과 불신과 불안의 시대에 ‘돈 쓸 맛이 난다’는 것이다. 아이폰 출시에 밤샘 줄을 선다든지, 카카오 캐릭터용품을 수집하고, 고가 생리대를 구매하는 것처럼, 애정, 위로, 안전 등 ‘기능’이 아닌 ‘마음’이 소비에 반영되고 있다.
이렇게 소비는 ‘OO트렌드’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포장되어 ‘돈 쓸 구실’이 된다. 그런데 이 트렌드라는 것은 소비자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만들어 유행을 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유행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으면 또 다른 유행이 생긴다. 그래서 소비자는 끊임없이 돈을 쓴다. ‘돈 쓸 구실’이 있으므로 언제나 마음은 편하다.
사실 가성비나 가심비는 경제학의 기본 개념으로, 새롭거나 특별한 것이 아니다. 경제학에 의하면 인간의 욕망은 무한한 데 비해 자원은 유한하므로 ‘희소성’으로 인한 선택의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고 우리는 선택에 수반되는 다양한 ‘비용’과 경제적 이익이나 만족감과 같은 ‘편익’을 잘 고민하여, 같은 비용이라면 최대의 편익을 얻고, 같은 편익이라면 최소의 비용이 들게 하는 ‘합리적 선택’을 하려 한다. 즉, 우리는 비용 대비 가장 큰 만족을 주는 대안을 선택하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족이 크다고 합리적 선택이라고 하진 않는다. 모든 선택에는 ‘여러 대안 중 하나의 대안을 선택할 때 선택하지 않은 대안 중 가장 좋은 것, 즉 차선의 가치’인 ‘기회비용’이 따르기 때문이다. 기회비용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으면 비용이 적어져 보이고, 과소평가 된 비용은 상대적으로 만족감을 크게 만드는데, 여기에 사람마다 가치관이나 취향이 다르므로 ‘기회비용’은 ‘얼마’라고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것이 문제다. 생산자나 유통에 이것은 매우 귀찮은 일이다. 개인마다 다른 기회비용과 만족감은 소비자의 다양한 요구로 이어지고, 각각의 입맛을 맞추려면 생산성과 효율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비자가 어떤 기회비용과 만족감을 느껴야 하는지, 심지어 언제 무엇을 사야 하는지까지 가르친다. 주로 광고와 같은 마케팅 기법을 통해 편익을 크게 보이게 하든지, 심리적 기회비용을 낮추어 비용을 작게 느끼게 하든지 하여 만족감이 극대화된 것 같은 착각을 주는 식이다.
그런데 경기는 어렵고, 소비자는 똑똑해졌다. 자기 마음대로 소비를 결정하므로, 갈수록 통제가 어려워지고 있다. 그래도 큰 문제 없다. ‘인생은 한 번뿐’이라는 키워드를 던져주고 ‘자신을 위해 소비하라’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주면 또 소비는 일어나니까. 무책임한 것 같으니, ‘제각기 살아갈 바를 도모해야 한다’는 정도의 회피성 언급만 해주면 된다. 2017년 트렌드라고 하였던 ‘YOLO(You Only Live Once)’와 ‘각자도생(各自圖生)’ 이야기다.
“내가 바보냐? 난 내가 원하는 것을 내 마음대로 사고 있다고”라며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혹은 “음모론이냐?”며 부정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원리만 알면 이것을 효과적으로 작동하게 할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인 원리는 심리학의 태도와 행동 개념에서 시작한다.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어떤 대상에 대하여 좋다, 싫다, 마음에 든다 등 평가를 한다. 이것을 ‘태도’라고 하며, 태도는 신념이나 감정에 큰 영향을 받는다. 태도는 행동을 유발하며, 태도와 행동은 비교적 일관성을 띤다. 하지만, 일관성은 ‘상황변수’라는 것에 따라 언제든 변할 수 있다. 인간은 태도와 행동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려 하기 때문에 균형이 깨지면 불편한 감정, 즉 ‘인지부조화’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균형을 다시 찾기 위해, 신념이나 행동을 바꾸게 된다.
이 간단한 원리를 이용하여 자기합리화나 변명거리를 소비자에게 주면, ‘합리적으로 소비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가장 흔한 것이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 Jean Baudrillard가 말한 ‘기호가치’이다. 제품은 기본적으로 ‘쓸모’인 사용가치와 ‘교환 관계’인 교환가치를 가지는데 여기에 상징과 연상을 담으면 사람들의 구매 기준은 달라진다. 세탁기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과 함께, 행복, 위세 등등의 요소로서의 역할도 하는데, 이 후자야말로 소비의 고유한 영역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토대 위에 다양한 기술이 들어간다. 프레이밍 framing을 통해 소비의 명분을 준다. 명절 전에는 돈을 많이 쓰므로 명절 후에 쓸 돈이 없다. 생산자와 유통은 이것을 기다릴 수 없다. 하여 ‘시월드’라는 프레임을 통해, 명절 기간 힘들었으니 ‘그에 대한 보상으로 소비’를 하게 하면 된다. 밴드웨건 band-wagon 효과도 쓸만하다.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집단심리와 모방심리, 그리고 집단에서 고립되는 불안감을 이용한 동조를 이용하면 일명 ‘제2의 교복’이라고 하는 ‘노스’ 유행도 만들 수 있다. 브랜드 네임 앞에 ‘super’나 ‘플러스’ 같은 수식어 modifier를 붙어 품질을 더 높게 인지하도록 해서 구매를 하게 할 수도 있다. ‘최저가 보상제’라는 한마디면 필요하지도 않은 제품을 한 무더기 사면서 ‘오늘 돈 벌었다’라는 이상한 셈을 하게 할 수도 있다. 어떤가? 지금도 ‘지름신이 내렸다’는 변명을 하며 생각지도 않은 것을 사고 있지 않은가?
2차대전 중 모르핀 부족으로 모르핀을 가장하여 식염수를 이용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도 통증 완화를 느낀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를 가짜약 효과(플라시보 효과 placebo effect)라고 하게 된다. 이후 실험을 통해 가짜 우울증 치료제로써도 효과가 있다는 것, 진통 및 신경 안정 효과는 있지만, 염증성 질환에는 효과가 없다는 것, 그리고 ‘나을 거라는 마음’이 뇌의 중전두회(中前頭回)를 반응시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렇듯 플라시보 효과처럼 플라시보 소비를 통해 우리는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플라시보 소비를 말하는 이들은 헛헛한 세상에 ‘짠내’ 풀풀 나는 소비만 하지 말고, 가짜 약인 줄 알면서도 통증이 줄어드는 것처럼 소비를 통해 만족감과 행복을 잠시라도 느끼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럴 것이다. 하지만, 플라시보 소비가 ‘심리적 위안’ 혹은 '자기만족'을 위함인지, 아니면 '현실도피'인지 헷갈리면 안 된다. 염증이 나서 항생제가 필요한데, 단순한 통증으로 착각하고 마음만 고쳐먹고 있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소비사회에선 정신 차리고 돈을 써야 한다. 아니면, 착각을 소비한 대가로 소비할수록 만족감 대신 불행감과 공허함만 갖게 될지니.
잊지마라! "'플라시보 소비'는 너의 돈을 삥뜯기 위한 또 하나의 프레임"이라는 것을!
※ 브런치 매거진, 『프로그래밍화된 심리』는 심리학 '이론' 자체보다는 '개론'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심리학자가 아닌 까닭에 적정선에서 다루는 이유도 있겠거니와, 심리학을 심리학 밖으로 꺼낼 때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리 현상을 모티브로 하여, 우리 일상의 고민과 소비의 연결고리를 찾는 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사실 우리네 고민의 대부분은 '상품을 소비'하는 것을 넘어, 이념, 정체성, 관계, 그리고 안정감(불안 해소)까지도 소비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복잡성, 그리고 혼란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요, 그것은 우리가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소비사회의 메커니즘과 매스미디어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것이죠.
즉 '불안'과 '죄책감'과 같은 심리상태는 사실,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세상을 보는 틀' 뿐만 아니라 '생각과 행동의 방식'마저 재단 당하고 암묵적으로 지시당한 결과 느끼게 되는 '프로그래밍화된 심리'이며, 이로 인해 우리는 그 어떤 '메커니즘'에 더 강하고 깊게 지배당하게 된다는 것이 저의 관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심리를 더 객관적이고 진지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기 자신의 삶에 더 다가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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