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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호훈 Jul 18. 2018

드라이한 세상, 이유 없는 사랑이 필요하다

“감정적 베풂과 이성적 똘레랑스 없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드라이해진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영화 https://movie.naver.com]


인간이 배우지 않고도 할 수 있는 것. 먹고 자고 싸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것. 부모가 자식을, 그리고 남녀가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여기에는 어떤 이유도 조건도 없다. 이것이 인류를 ‘지속’시켜주는 ‘생명의 힘’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이 생명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사랑을 상실한 듯 너무나 헛헛한 세상이다. 과연 우리는 이 공허함을 사랑으로 채울 수 있을까?



사랑을 상실한, 사랑 과잉의 시대


사랑만큼 많이 쓰는 단어가 있을까? 사랑만큼 예술의 단골 주제가 있을까? 사랑만큼 인기 있는 사상가들의 사유 대상이 있을까? 인류는 오랫동안 사랑에 대하여 고민하고 이야기해왔다. 그것은 사랑이 철학자들만의 것이 아닌 인류 각 개개인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양한 연구 결과, 사랑은 진화심리학적으로는 번식과 생존 본능에 따른 심리적 구조에 기인한 인간의 행동이라는 것, 생물학적으로는 도파민이나 옥시토신과 같은 신경화학 물질이 분비된 결과라는 것을 밝혀냈다. 매슬로우 Maslow와 같은 이들은 인간이 관계 안에서 사랑을 주고받고 싶은 ‘소속과 애정(belongingness and love)’욕구가 있다며 사회적 관계 안에서 사랑을 해석하기도 하였다.


캐나다 심리학자 리 John Alan Lee는 사랑을 다양한 색깔에 비유하여 6가지 유형-낭만적 사랑인 ‘에로스 Eros’, 우애적 사랑인 ‘스토르게 Storge’, 유희적 사랑인 ‘루두스 Ludus’, 이타적 사랑인 ‘아가페 Agape’, 소유적 사랑인 ‘마니아 Mania’, 그리고 논리적 사랑인 ‘프라그마 Pragma’-으로 분류(사랑의 색채 이론, Color wheel theory of love)하였다.


이렇게 우리는 사랑에 대하여 더 똑똑해졌다. 그런데도, 인륜을 저버린 각종 사건•사고는 끊이질 않고, 여혐•남혐 등 사랑의 대상이 갈등과 증오의 대상으로 되고 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세계 최고 자살률로 나타나고 있다. 누구와도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고 이렇게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있는데, 우리는 왜 그중에 하나를 선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사랑, ‘누구와’가 아닌 ‘그 무엇과’로 변하다


과거의 결혼은 두 집안의 이해관계에 따른 전략적 결합이라 할 수 있다. 사랑이 결혼의 필요조건은 아니었다는 것. 그러나 ‘근대적 개인’의 탄생과 함께 낭만적 사랑이 개인의 삶에 들어오며, 사랑은 결혼의 전제 조건이 되었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 ‘사랑이라는 감정’이 ‘사랑상품’을 통해 소비되고 교환되며, 서로의 사랑상품을 셈하는 과정을 통해 사랑은 증명된다.


자본주의는 존재하는 것들에 가치를 매기고 서로 교환하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안전한 거래’를 원한다. 그래서 그 불안감의 방어기제로서 출신과 학벌, 직업, 재산 등을 따지며 예물, 패물을 주고받는 의식을 통해 사랑에 대한 확인을 하게 된다. 이렇게 사랑의 검증 과정이 촘촘해지는 반면, 그 조건을 충족하기는 더 까다로워져 사랑이 사치로 여겨지는 시대가 되었다. 행여 연애를 하더라도 ‘안전한 거래’를 위해 사랑보다는 조건을 좇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남성은 낭만적•유희적 사랑을, 여성은 우정적•논리적•소유적 사랑을 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최근엔 남녀 모두 논리적 사랑을 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고 한다. 미루어 보건대, 이는 물질주의의 영향일 것이다. 즉, 우리는 어떤 사람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기보다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가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두고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 Jacques Derrida는, 사랑에 있어 ‘누구(the who)'와 ‘무엇(the what)' 사이의 차이가 문제를 발생시킨다고 한다.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은 대개 ‘누구’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거나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부 사랑’이 판을 치니, 순수한 사랑은 현실 세계엔 없고 점점 더 메마른 사회가 되어 가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All you need is love”


‘나무와 친구인 소년이 있었다. 나무는 평생 자신의 것을 다 소년에게 내어 주며 행복했다’ 셸 실버스타인 Shel Silverstein의 그림책 《아낌없이 주는 나무》 내용이다. 나무의 헌신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해 ‘착한 아이 증후군’이나 ‘빈둥지 증후군’과 같은 부정적인 언급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 엠 샘》(I Am Sam, 2001)이나 《제8요일》(Le Huitieme Jour, 1996)과 같은 조건 없는 사랑 이야기에 큰 감동을 받곤 한다.


《아이 엠 샘》은 지적 장애로 7살 지능에 멈춘 샘(숀 팬)과 그의 어린 딸 루시(다코타 패닝)가 가족이라는 끈을 지켜나가는 이야기다. 아빠로서 양육 능력이 없다며 입양을 추진하는 사회복지기관과 어쩌다 무료 변호를 맡게 된 도도한 엘리트 변호사 모두에게, 샘은 지능은 낮지만 양육 능력보다 중요한 사랑을 보여줌으로써 아빠로서의 자신의 능력을 증명한다. 물론 샘은 양육 능력의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사람들을 감동시킴으로써 루시에게 더 크고 많은 사랑을 준다.


《제8요일》은 세일즈 기법 강사로 성공은 했지만 차갑고 계산적인 태도로 부인과 별거 중인 아리(다니엘 오떼유)가 요양원에서 탈출한 다운증후군 환자 조지(파스칼 뒤켄)를 만나 조지의 순수함에 위로를 받으며 사랑의 소중함을 깨닫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조지를 통해 아리는 따뜻함을 되찾고, 아리의 이러한 변화를 보며 부인은 다시 아리를 받아주게 되지만, 조지는 죽은 엄마의 환상을 보며 엄마의 사랑을 좇아 옥상에서 몸을 던진다.


결국 영화 속 샘이나 조지는, 단순하고 평범한 사랑을 통해 더 자주 행복을 느끼게 되면 일상이 조금 더 따뜻해 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순수한 사랑 타령이나 하며 감상에 젖자는 것은 아니다. 출산율이 ‘0명대’인 지금, 저출산 정책으로 ‘삶의 질’을 이야기하지만 개인 간의 사랑과 행복의 총량이 사회적으로 배려를 만들 때 진정한 ‘삶의 질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덕 본다는 생각을 하지 마라


두 영화 모두 지적장애인이 주인공이다. 낮은 지적 수준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이들이 이유 없는 사랑으로, 손익을 따지며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준다. 물론 그 울림은 그들에 대한 편견이나 조건을 버리고, 그들을 한 인간으로서 존중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여기서 사랑을 위한 중요한 조건 한 가지를 볼 수 있다. 똘레랑스 tolérance다.


똘레랑스는 프랑스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중 하나다. 우리말로 관용(寬容) 즈음으로 해석되는 이 단어는 사실 동양적 의미의 ‘너그러움’을 의미하진 않는다. 오히려 ‘나와 타인과의 차이를 인정하고,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감정이 아닌 매우 이성적인 판단이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는 법륜스님이 주례사에서 말한 바와 같이, “덕 보려고 하지 마라”는 것이다.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이것저것 따져 보는데, 그 따져 보는 그 근본 심보는 덕 보자고 하는 것입니다.···손해 볼 마음은 눈곱 만큼도 없습니다.···그런데 이 덕 보려는 마음이 없으면 어떨까요? 좀 적으면 어떨까요?···이렇게 베풀어 줘야겠다는 마음으로 결혼을 하면, 길가는 사람 아무하고 결혼해도 별 문제가 없습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바라는 것이 없으니 작은 것에도 행복할 수 있다.


산업사회의 중요한 가치인 ‘효율성’과 ‘생산성’이 사랑이라는 감정에까지 영향을 미쳐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심리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래서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더 큰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혜가 깊은 사람은 자기에게 무슨 이익이 있음으로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한다는 그 자체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라는 파스칼 Pascal의 말을 되새겨 봐야 할 시점이다.



            ※ 브런치 매거진, 『프로그래밍화된 심리』는 심리학 '이론' 자체보다는 '개론'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심리학자가 아닌 까닭에 적정선에서 다루는 이유도 있겠거니와, 심리학을 심리학 밖으로 꺼낼 때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리 현상을 모티브로 하여, 우리 일상의 고민과 소비의 연결고리를 찾는 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사실 우리네 고민의 대부분은 '상품을 소비'하는 것을 넘어, 이념, 정체성, 관계, 그리고 안정감(불안 해소)까지도 소비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복잡성, 그리고 혼란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요, 그것은 우리가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소비사회의 메커니즘과 매스미디어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것이죠.
           즉 '불안'과 '죄책감'과 같은 심리상태는 사실,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세상을 보는 틀' 뿐만 아니라 '생각과 행동의 방식'마저 재단 당하고 암묵적으로 지시당한 결과 느끼게 되는 '프로그래밍화된 심리'이며, 이로 인해 우리는 그 어떤 '메커니즘'에 더 강하고 깊게 지배당하게 된다는 것이 저의 관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심리를 더 객관적이고 진지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기 자신의 삶에 더 다가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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