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무늬들
가사가 예쁜 선율을 듣고 있으니 저절로 무언가를 쓰고만 싶은 밤이다. 적절하게 배치된 단어들, 사랑스러운 분위기, 마음을 뭉근하게 만드는 목소리.
그러니까 오늘 같은 밤은.
마음을 풀어헤지게 만들어주는 구절들이 적힌 예쁜 시를 읽거나, 시를 짓고 싶은 날이다. 꽉 닫혀있던 무심한 마음이 속절없이 부드럽게 풀어질 수 있도록. 이왕이면 직접 짓고 싶은데, 어쩜 나이를 먹어갈수록 시 쓰는게 더 어려워지는 것인가.
가장 적절한 단어와 표현들, 마음속에 가라앉는 구성과 타이밍을 찾는 순간들, 내겐 그런 순간이 없는 듯 하다.
혼자만의 독백이라고 생각했지.
너라는 사람한테는 나의 독백이 너의 심정에 아무런 영향도 못 줄 것 같았어. 어떤 경험을 했던 도움이 되겠지. 글을 쓰는데도, 다음 사람에게도, 너에게도.
밖으로는 무미건조한척, 태연한척, 속으로는 한없이 볼품없는 속빈 강정.
너는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일까?
5년 전에 받았던 편지 한통 중 가장 인상 깊은 한 문단을 통째로 옮겨 놓는다. 그때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감정들이 거기 오롯이 적혀있다. 나와 동일시하여 전달하는 동질감과 공감대, 그리고 위로.
조용미 시인의 <젖은 무늬들>
하단에 전문을 옮겨 놓는다.
젖은 무늬들 詩 조용미
당신의 어깨 위에도 내 머리카락에도
안개는 뭉클뭉클 섞여
안개 속에서 우리는
허무와 피로를 극복하는 법을
오래도록 생각한다
비와 안개가 출렁이는 우기의 마지막 하루
노각나무 흰 꽃들
바닥에 떨어져 뭉개어지고 있다
비에 젖고 발에 밟혀 파묻히는 흰 빛들,
물끄러미 바라보는
젖은 무늬들
머리 위에 맺혀 있는 한 방울의 구름
손바닥 안 한 줌의 모래
당신과 나는 천천히
안개 속을 걸어 내려온다
보이지 않는 빛들이 당신과 내 몸에 묻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