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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lerie Lee Jun 26. 2022

배우 도전 일기 #11

마지막 오디션을 앞두고


0. 전의 상실


어느덧 6월 말.


마지막 오디션을 앞두고 나는 사실 전의 상실의 상태에 빠졌다. 그 전 오디션에서 나름 희망을 또! 가졌었던 터인데 다시 고배를 마셨다.


2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했다. 2년 전에 나는 그래도 나름 조건 괜찮은 직장과 스펙 좋은 건실한 남자 친구가 잠깐 있었었다.


문제는 내가 그 두 가지 모두 사실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사랑하지 않았던 터였다는 것이다. 그럼 지금 와서 그 두 가지를 제 발로 차 버린 것을 후회하냐고, 시간을 돌리고 싶느냐 물어본다면 그건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제 배우의 꿈을 접는다면 다시 "조건 좋은 직장과 스펙 좋고 건실하며 다정한 남자 친구" 이 두 가지를 희망하고 바라며 살게 되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실제로 희망하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그 상태가 매우 무료하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1. 양양으로 무작정 출발


매주 토요일은 학원에 가야 했지만, 사실 강사님들의 서로 다른 피드백에 헷갈리기만 하는 티칭 방식에 진부함을 느껴서 나 혼자 연습하는 것이 오디션에 더 도움이 된다는 판단을 내렸다.


또한 지금 나에게 정말 필요한 건 리프레시가 아닐까 싶었다. 강남은 진짜 맨해튼 한가운데와 똑같다. 그것도 내가 제일 숨 막힌다고 생각하는 타임스퀘어 부근. 뻥 뚫린 바다가 보고 싶었다. 또 무더위를 피하려 밖에 나가지 않다 보니 자연스레 바뀌어버린 밤낮을 다시 돌려놓아야 했다.


양양으로 가는 버스표를 일단 끊고 그곳에서 어디를 가야 할지 정했다.


2. 서핑과 생각 실험


밤에 한 잠도 자지 못하고 아침 버스에 올라타서 도착한 양양 서피 비치. 핫플답게 젊은 남녀들이 큰 줄을 이루며 맥주와 피자 등을 주문하려고 인산인해를 이루는 모습을 보자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서핑을 시작하고 나서는 마음이 바뀌었다. 정말 길게 느껴진 지상 교육을 마치고 강사님이 밀어주며 하는 수상 강습을 시작했다.


'내가 설마 저 보드 위에서 일어나 보기야 하겠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렇지만 이왕 하는 거 어떤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그냥 정말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고, 무조건 성공한다 생각해보면 어떨까?"


강사님은 6명의 사람들을 돌아가며 각각 다섯 번씩 파도가 오는 타이밍에 맞춰 밀어주셨다. 강사님의 호령 : "패들, 푸시! 업!"에 맞추어 서핑 보드 위에서  서서 밸런스를 잡아야 했다.


처음에는 보기 좋게 일어서려고 하자마자 넘어졌다. 두 번째에는 뒷발(오른발)을 직각으로 두는 데에는 성공해놓고 엉덩이가 너무 무거워 일어서지 못하고 넘어졌다. 세 번째에는 뒷발로 딛고 앞발까지 포지셔닝했고 일어섰지만 정면을 노려보지 못하고 다른 쪽을 봐서 꽈당했다. 실제로 내가 일어선 게 너무 놀라워서 소리를 질렀다.


이쯤 되니 서서히 지쳐가기 시작했다. 이만하면 오늘 내가 나한테 기대한 것 이상으로 해낸 것 같아서 그만하겠다고 했다. 강사님은 그래도 아까 잘 일어서셨는데, 이번에는 눈이 부셔도 정면을 보며 일어서라고 하셔서 한 번 더 탔다. 이번에도 정면을 바라보지 못하고 밸런스를 잡지 못해 일어서자마자 넘어졌다.


강사님께 어제 잠도 한 숨 못 자고 해서 이제 여기까지 탄다고 했는데, 어차피 강습이 다 끝나가니 한 번만 마지막으로 더 타라고 하셨다. 이제 될 대로 돼라! 하고 다시 탔다. 사실 네 번째 까진 타기 전에 무조건 성공한다고 생각하고 탔다몈 이번에는 그냥 이왕 육지로 올라가는 거 서핑하면서 간다고 생각하고 탔다. 그랬더니 웬걸, 정말 차분히 보드 위에서 일어나 차분히 파도를 타서 육지까지 가는 데에 성공했다. 도중에 옆에 오는 다른 조 강습생이 균형 잡느라 본능적으로 나를 밀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서있었다.


3. 작은 성취가 주는 힘&깨달음


"물들어 올 때 노 져어라"

"트랜스 서핑, 동시성을 이용해라"


등 소위 영적인 가르침들이 이번 서핑을 통해 조금 이해가 갔다. 일단 파도가 들어오기 너무 전도 아닌 바로 직전에 패들링(손으로 노졋는것)을 미친 듯이 하여 속력을 내고, 파도가 들어오는 적절한 타이밍에 힘을 불끈! 내어 "자신감 있고 멋있는 스탠스(자세)로" "땅/물을 보지 않고 목적지(정면)를 바라보며 일어서서" "밸런스(균형)를 잡으며 파도를 즐기는 것" 이 곧 서핑이다.


파도가 거대한 우주의 흐름이나 움직임으로 내가 막을 수 없는 어떤 흐름이라면 그 흐름 위에 올라타 서핑하듯 살아가는 자세를 트랜스 서핑이라고 한다.


이번 오디션이라는 파도에서 꽈당할지, 아니면 정말 어딘가에 도착하게 될지 알 수는 없지만, 무엇이든 쉽게 빨리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만약 정말 취직을 하게 되더라도 주말마다 연기 연습을 하고 될 때까지 오디션을 보는 사람이 되어보는 것은 어떨까 싶기도 했다.


또 연기가 아니더라도, 내 인생에서 마주하는 여러 파도들을 서핑하듯이 이용하여 즐기며 살아가다 보면 어디든 닿아있지 않을까?라는 긍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서핑에서 거둔 작은 성취 덕분인지 돌아오는 심야 버스 안에서도 기분이 좋았다. 잠깐이지만 파도 위를 누비는 그 기분이란! 파도라 함은 원래 흔들림을 주고, 어쩔 때는 무서운 것이지만, 서핑을 하는 사람에게는 또 한 번 즐길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고 멀리 나아가기 용이한 바람이고, 심지어는 평안함도 주는 그런 것이겠지.


앞으로 기회가 될 때마다 서핑을 하러 다닐 것 같다.

또 월요일에 있을 오디션을 환영하고 즐기는 마음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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