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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lerie Lee Oct 02. 2022

불행을 이기는 희망

행복할 이유를 찾는 사람이 되자.

불행할 이유를 늘 찾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 곁에 나는 너무나 오래 살았다.

그 사람의 불행은 항상 타인 탓이었다.


내가 학생으로서 잘 나가고 공부 잘할 때,

동생 아프지 않았을 때도 그 사람은 불행했다.

누가 이래서 죽고 싶다, 저래서 죽고 싶다.

내가 죽어야 어쩌고 저쩌고. 네가 이래서, 저 사람이 이러저러해서 걱정이고 불만이고.


세상에 마냥 늘 불행한 사람도 없고 행복한 사람도 없다지만, 자신이 입 밖으로 내뱉는 말과 행동들의 대다수가 불행과 불안에 관한 것이면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반대로 객관적인 상황이 어떻든 행복과 희망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면 그 사람은 행복하고 희망적인 사람이다.


가장 오랜 시간, 가장 가까운 사람이 항상 불행하다 보면 그것이 마치 내 책임인 것처럼, 내 탓인 것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그 사람은 내 탓을 하기도 하니 말이다. 그래서 나도 죄책감과 수치심에 잠식되고 우울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사람은 항상 불행할 이유를 찾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 사람의 불행은 내 탓이 아니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람 때문에 기분이 나빠야 할 필요는 없다.


의식적으로 희망적인 생각, 긍정적인 사고를 하고,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고, 사람들에게 밝은 모습을 보여야지. 그렇게 나는 불행, 불안, 걱정, 피해의식 같은 삶을 좀먹는 것들로부터 나를 지켜야 한다. 어제 <샌드맨>을 정주행 했다. 타락한 천사이자 위대한 악마 루시퍼와 꿈(드림)의 대결 장면에서 천사가 "Anti-Life", 그러니까 생명, 살아가는 모든 힘에 반하는 것으로 변모하여, 모든 것을 품고 생명을 잉태하는 Universe(우주, 세계)로 변모한 꿈을 짗밟았다. 꿈은 더 이상 Anti-Life 보다 더 강력한 힘을 찾지 못하여 죽어가고 있을 때, 그의 조수의 도움으로 "희망"이라는 것을 생각해 낸다. 희망이란 그 어떤 절망 속에서도 긍정의 가능성을 보는 것이다. 고로 모든 것의 끝이라고 할 수 있는 반-생명, 그 자체에서도 희망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게 꿈은 살아난다.


어쩌면 이게 사람들이 교회를 가는 이유 아닐까? 교회에서는 소위 "영적 전쟁" 이란 말을 쓴다. 꿈과 악마가 벌인 그 전투가 인간의 내면 속에서도 일어나는 것이다. 사람이, 세상이 나를 실망시키고 아프게 하더라도 신이라는 존재, 예수라는 선하고 초강력한 존재의 보호 하에 있다고 믿으며 살아가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어서 아닐까? 어떤 이는 예수나 종교가 모두 픽션이고, 그저 인간의 상상이 지어낸 개념이고 실체가 없다 주장한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인간의 사고와 상상에서 만들어진다. 고로 누군가가 어떤 것을 믿으면 그 믿는 개념은 마치 살아 숨 쉬며 날아가는 나비만큼이나 생생하고 실체가 있는 것과 다름없다. 적어도 그 사람에게만큼은. 그리고 그 사람이 계속 그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더 많은 이들이 그 사람의 믿음에 전염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주변에 불행이 아니라 희망과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생각을 교정하고자 한다.

그리고 나를 위해 일하는 믿음을 가지고자 한다.

" 나는 비록 지금 000하지만, 앞으로 000할 것이다."라는 사고가 효과적이다.

예)


1. 비록 지금 나는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고착화된 심리적 역동 때문에 계속해서 타인과 친밀감을 지속하고 나누는 데에 있어서 힘듦을 겪고 있지만, 분명히 나는 이 역동의 습관에서 벗어나 평화롭고 안정적이며 믿음에 기반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2. 비록 내 주변에 불행과 불안을 내뿜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사람들의 감정과 내 감정을 분리하고 나는 내 행복과 희망을 키워 나갈 것이다.


3. 나에게는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있지만, 그것들이 반드시 불안과 불행을 야기시켜야 하는 과제들이 아닌, 기쁜 마음으로 나의 발전을 위해 풀어야 나가야 할 과제이다.


4. 비록 오늘의 나는 완벽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고, 앞으로도 완벽해질 수 없지만, 나는 매일 조금씩 모든 면에서 발전하고 나아지고 있다.


이 글을 읽은 모든 사람들이 정말 딱 오늘 하루만큼은 불행할 이유보다 행복하고 Rejoice(즐거움을 표현하는) 하는 하루를 만들기로 결정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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