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Valerie Lee
Nov 03. 2022
내가 연기를 배우고 있는 선생님께서는 연기자들의 연기를 보면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이 보인다고 하셨다. "정말요? 그래도 연기는 남의 삶을 연기하는 건데 어떻게 그 사람의 삶이 보인다는 거예요?"라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내가 연출을 전공했으니 그 감독의 영화를 보면 그 감독의 사람 됨됨이가 보이지 않느냐고 물어봤다.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나에게 그런 영화였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면 사실 홍상수라는 인간이 너무 많이 묻어나서 보기가 힘들었다. 또 내가 만든 작은 영화들에도 내가 너무 많이 노출되는 것 같아 무섭기도 했었다.
연기도 많이 하고, 어느 정도 내가 더 이해가 깊어지면 연기자들의 인간 됨됨이가 보이기 시작할 것이라 생각하니 조금 두렵다. 한동안 영화를 많이 못 본 이유는 "아, 이 영화는 이런 의도와 이런 메시지와 이런 사상을 가지고 만들었네? 근데 그게 나랑 잘 안 맞네?" 이렇게 되어서 중간에 꺼버리는 경우가 잦아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연기에서 그런 게 보이기 시작한다면... 나는 이제 어떤 콘텐츠를 볼 때 즐거움이 너무 줄어드는 게 아닐까 살짝 겁이 난다.
그런데 그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내 실체다. 연기를 통해 마주 보게 되는 나의 "core" / "중심부". 마치 해리포터에 나오는 마법 지팡이의 가장 중심에 들어가 있는 "심지"가 드러나는 게 아닐까 싶어서다.
이번에 입시 연기를 하면서 나를 정말 많이 알게 되었다. 어떤 대사를 부여받고 내가 처음 해석하는 방식, 연기하는 말투와 톤, 캐릭터 해석 선택... 이 모든 것이 내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었고 그 모습은 솔직히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ugly 한, 조금 추한 모습이었다.
나에게는 남을 원망하는 마음이 많은 것 같다. 물론 내가 받은 대사들이 뭔가 애초에 "짝사랑하는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지 않음에 슬퍼하는 캐릭터" 또는 "바람난 남편의 죽음을 자신 탓이라고 생각하는, 심장을 잃은 과부" 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볼 수도 있다. 내 사랑을 돌려주지 못하는 남자, 날 두고 바람난 남자... 이 얼마나 원망하기 딱 좋은 사람들인가.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한이 쌓인 상태를 많이 연기했다. 하지만 그런 건 내가 이미 잘하니까, 선생님은 이제 내가 나를 넘어서서 "바람난 남편을 원망하는 마음까지 초월해서 너무 아끼는 추억을 선사한 소중한 사람으로 기억한 채로 작별인사를 하는 과부"로 연기하기를 주문했다. "아니... 나를 두고 바람난 남편이 나한테 찝찝하게 죄책감까지 심어주고 죽었는데 어떻게 소중한 추억이지...?" 싶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해석도 말이 된다. 내가 연기할 캐릭터 글로리는 이제 원망과 미움, 끝없는 우울의 늪에서 나와 남편을 고이 보내주고 (오로라를 보며 작별을 하고자 한다) 새 시작을 하려고 하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나도 실연의 아픔 정도는 경험해 봤는데, 누군가를 완전히 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마저 없어진 그 상태란것읗 알기에 설득되었다. 다만 나는 사실 나의 전 연인들의 행복까지 바래 주지는 못하는 사람이었다. 사실 그들을 인간적으로 좋아하지 않게 된 것이 컸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쨌든 서로에게 스트레스가 되어서 이별을 택했기 때문에... 굳이 좋은 기억이 있어도 상기시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정말 냉정하게 돌아본다면 그들이 내 삶에서 채워준 좋은 기억과 교훈들이 분명 있었다. 그것들을 나는 애써 부정하고 그들과의 기억을 애써 나쁘게 기억하는 데에만, 또는 없었던 기억으로 만드는 데에만 익숙해져 있었다. 나는 나와 이제 다시는 볼일이 없지만 한 때는 가까웠던 친구들이 내게 준 여러 기쁘고 행복한 추억들을 없던 일처럼 생각해야만 그 이별들을 극복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조금 더 성숙한 이별의 태도는 고마웠던 점과 좋았던 기억들은 간직하고 고마움을 느끼며 그들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 아니었을까.
그래 나는 어쩌면 내 지난 인연들 - 이성친구와 동성 친구를 포함한 여러 파투난 관계들을 - 진정으로 용서하지 못했다. 그들을 용서할 수 있다면, 내 삶에 더 큰 활력이 생기고 내가 한 층 더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생각이 든다.
연기는 이처럼 내가 상상하지도 못한 나의 모습을 보여주고, 좀처럼 생각해보지 못한 생각들을 떠올리게 해 주는 것 같다. 또 다른 나의 모습들도 많은데... 보면 볼수록 나는 모자란 점, 부족한 점만 많이 보이는 것 같아 글로 다 쓰기가 창피하다.
그리고 반대로 내 주변의 사람들 -특히 내 부모님의 위대함이 크게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나 많은 희생으로 나를 키우셨는지가 새삼 더 크게, 크게 확대가 되어 보인다. 그리고 내가 받았는지도 몰랐던 타인들의 배려와 관심, 따뜻한 마음이 더 크게 와닿는 것 같다. 나는 왜 여태 그렇게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시니컬하게 보았을까. 정답은 잘 알고 있다. 기대했다 상처받느니 그게 더 나으니까.
연기를 통해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될지는 앞으로 지켜봐야겠지. 하지만 정말로 나는 내가 타인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고, 내 지인과 가족에게 떳떳하고 그들이 내 덕을 많이 볼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 결국 그게 한 인간으로서 성공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