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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여름잠 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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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담 Sep 08. 2024

말린 우울의 향기


 자취 생활 제1 법칙, 부지런할 것. 혼자 사는 집일수록 부지런해야 한다. 게을러지는 순간 집안 곳곳에 티가 나기 시작한다. 먼지가 쌓이고, 먹을 게 없으며, 입을 옷이 없다.
 먼지가 쌓인다거나, 먹을 게 없는 건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물티슈 한 장에 말끔히 사라지는 게 먼지고, 어쩌다 한 번쯤은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할 수도 있는 거니까. 가장 곤란한 건, 전날 밤 미리 생각해 놓은 옷가지가 빨래 바구니에 있을 때다. 이때는 해결책이 따로 없다. 날씨와 장소에 꼭 맞는 그 옷을 포기하는 수밖에.

 이틀에 한 번꼴로 빨래한다. 빨랫감이 많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옷장 하나에 사계절 옷이 다 들어갈 정도니 때마다 입을 수 있는 옷이 그리 많지 않다. 세탁기를 돌리는 기준이 빨래 바구니의 포화상태라면, 당장 내일 신을 양말도 없을 수가 있다.  
 아담한 집에 어울리는 건조대를 사용한다. 대략 여섯 뼘 정도의 높낮이로 옷장 안에 쏙 들어갈 크기다. 보관에 쉬울뿐더러, 마치 옷이 많은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을 준다. 세탁기에서 막 꺼낸 축축한 옷 몇 벌을 널다 보면 금세 만석이다. 깨끗이 헹구는 것까지가 세탁기의 몫이라면, 잘 말리는 것은 나의 몫이다. 애써 산뜻해진 옷에서 쿰쿰한 냄새가 나지 않도록 자리 배치에 신경을 써야 하는데, 이때 옷걸이만큼 기특한 도구는 또 없다.

 물건도 개성의 시대다. 앙상한 철심이 도드라진 것, 도톰한 플라스틱에 안정감이 느껴지는 것 등 옷걸이의 재질과 형태가 제각각이다. 가끔은 그 개성을 옷감에 고스란히 표출하곤 한다. 수분 끼가 날아갈수록 옷의 맵시는 석고로 본뜨듯 옷걸이와 닮아간다. 민소매처럼 끈이 달린 옷을 걸기 좋게 홈이 파여 있는 옷걸이는 어깨선을 따라 작은 뿔을 만들곤 한다. 그때마다 급한 대로 물을 묻혀 눌러보지만 좀처럼 가라앉질 않는다. 옷걸이를 잘못 고른 나의 업보다.

 정교하게 기계화된 세탁기는 믿음직스럽다. 시스템대로 세제와 섬유 유연제를 넣고, 헹굼과 탈수까지 알아서 마무리할 테니까. 빨래할 때 신경 써야 할 건, 옷에 구김이 생기지 않으면서 좋은 향기가 유지되도록 잘 말려야 하는 나의 임무뿐이다.   

                                          *
 
 울적한 하루다. 분명 2년 전의 나였다면 집에 들어가는 길에 740ml짜리 맥주 한 캔을 샀을 거다. 거기에 안주로 조금 기름진 음식들, 이를테면 햄버거나 곱창 또는 닭강정을 상에 차렸을 거다.
 우울은 수용성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본래의 의미처럼 샤워하면 기분이 한결 나아지기도 하지만, 나 같은 경우엔 맥주 한 캔이 우울을 녹여냈다. 20대 중반엔 매주 목요일마다 '맥주 데이'를 가졌는데, 맥주 한 캔과 좋아하는 음식을 곁들여 영화를 보는 나만의 작은 이벤트 같은 거였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마냥 좋은 시절이었지만, 그 당시의 나에겐 목요일은 양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중압감이었나 보다. 콜라와는 다른, 어른의 맛이 나는 탄산이 그 무게감을 덜어주는 듯했다.

 그렇다고 술을 잘 마시는 편이 아니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체질적으로 알코올이 몸에 잘 안 받는 편이다. 아빠를 닮았으면 모르겠지만, 빼도 박도 못하게 엄마를 닮아버렸다.
 누군가와 함께 마시는 술은 기분 좋은 여운을 남겨주지만, 혼자 마시는 술은 후회로 변질되고 만다. 숨을 내쉴 때마다 나는 은은한 맥주 향이 비릿하게 느껴지고, 간에 빚을 진 것만 같은 죄책감이 든다. 맥주가 스트레스를 덜어준다고 생각했던 건 순전히 내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내 가설이 맞았더라면, 마음에 주름지고 쉰내가 날 리가 없을 테니까.  

                                         *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고. 쥐어짜 내지 못할 만큼 힘들었던 하루를 마무리한다. 절반 정도 찬 빨래 바구니를 털어 세탁기를 돌렸다. 대략 한 시간 정도 지나면 우리 집에서 가장 경쾌한 멜로디가 들린다. 빨래가 끝났다는 신호다. 이제부터는 나의 할 일을 해야 한다.

 세탁 통에 한 덩어리로 엉겨있는 옷을 꺼내 탈탈 털어 준다. 특히 평소에 즐겨 입는 흐물거리는 셔츠는 조금 더 신경 쓴다. 환경에 따라 색을 바꾸는 카멜레온처럼, 얇고 부드러운 소재의 셔츠는 너는 방식을 그대로 흡수해 옷의 태를 결정해 버린다. 자칫하면 또 어깨에 뿔을 달고 나가야 할지도 모르니, 최대한 굴곡이 없고 안정감 있게 받쳐줄 수 있는 옷걸이로 고른다.
 나를 옷으로 치면 뻣뻣함과 거리가 먼 이 셔츠가 아닐까 싶다. 주위의 상황과 말에 쉽게 구겨지는 사람이니 딱 맞다. 눅눅한 우울감에 절은 나를 반반히 널 수 있는 튼튼한 옷걸이가 필요하다.

 모든 일에서든 끝마무리가 중요하다. 빨래도 그렇고, 마음을 달래는 일 또한 마찬가지일 거다. 아빠를 닮았더라면 오늘 저녁 나 홀로 맥주 데이를 가졌을 텐데, 아쉽지만 다른 방식으로 유종의 미를 거둬야겠다. 둥굴레차나 라벤더 차같이 티백을 우려내거나 또는 적당히 단 녹차라떼 한 잔을 마시는 것, 구겨진 마음을 펼쳐낼 새로운 나의 몫이다. 덜 자극적이면서 속이 편안한 스트레스 해소법이다.

 내일 아침 눈을 떴을 땐 밤사이 반듯하게 마른 옷처럼, 내 마음도 한결 뽀송해졌길 그리고 개운한 향기가 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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