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 가는 걸 무지하게 좋아한다. 주말은 카페에 놀러 가는 날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민이랑 함께 가는 날에는 몸만 가볍게 다녀오지만, 혼자 갈 때에는 늘 가방에 짐이 한가득이다. 일요일 오후, 민이와 점심을 먹은 뒤 단골 카페에 가려고 했는데 그의 피치 못할 사정으로 계획이 무산됐다. 고로 나는 종이와 연필깎이, 색연필과 책을 가방에 욱여넣었다. 노트북도 챙길지 잠시 고민했지만, 조금이라도 욕심을 덜기로 했다. 민이는 내 가방을 보며 나의 하루를 짐작하곤 한다. '오늘은 카페에서 살 작정이구나'라는 식으로. 어쩜 이리도 정확하게 보는 건지, 그의 말이 맞을 확률이 높다. 나에게 있어 카페는 아주 좋은 놀이터니까.
나는 카페에, 민이는 집으로. 점심밥으로 순댓국 한 그릇 든든하게 먹고 각자 갈 길을 갔다. 좋아하는 공간에 간다는 건 도착하기 전부터 신나는 일이다. 문을 열자마자 은은하게 퍼질 원두 향과 유리창으로 살짝 들어올 적당히 따스한 햇살까지, 발걸음을 가볍게 만드는 이유들이다. 늘 그렇듯 아이스커피 한 잔에 마들렌 하나 주문하고, 상상했던 그림이 나올 수 있도록 햇빛이 잘 드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음, 뭘 해볼까. 우선 가볍게 몸풀기용으로 책부터 꺼내 든다. 한 쪽, 두 쪽... 아니다, 그림을 그리는 편이 낫겠어. 책을 도로 가방에 넣고 색연필을 꺼냈는데 뭘 그릴지 도통 생각이 안 난다. 민이의 말처럼 죽치고 앉아 있을 각오로 왔건만, 궁둥이를 붙인 지 얼마 못 가 결국 패배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에어컨과 선풍기부터 틀었다. 그리곤 그대로 방바닥으로 낙하. 멀뚱히 천장을 보다가 겨우 손가락을 움직여 민이에게 집으로 돌아왔다는 일종의 생존 신고를 했다. 사람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릴 때 놀라는 법, 웬일로 일찍 집으로 돌아갔냐며 민이가 놀란다. 아마 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듯하다.
음, 글쎄... 오늘은 그냥 집에서 쉬고 싶었나 봐.
*
머리를 댕강 잘라버렸다. 대략 한 뼘 반 정도. 머리카락의 끝이 어깨에 닿지 않을 정도로 자른 건 연 4년 만인 듯하다. 하루 이틀 고민한 결과가 아니다. 적어도 한 달 이상은 진득이 고민했으니. 의지 때문이라기보단 주변 반응을 지나치게 의식한 탓이다. 잘려 나간 길이만큼 놀라는 정도가 비례하다 보니, 소심한 나의 성격상 그에 대한 호응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먹이를 주는 쪽이 이기기 마련이다. 단발머리의 이름 모를 여성분 사진 한 장이 미용실까지 가기 위한 든든한 한 끼가 되어줬다.
머리를 볶든 자르든 간에, 누군가에게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일 순간이 다가오면 긴장하게 된다. 설령 그 대상이 가족이나 애인일지라도. 물론 직장 동료도 예외는 아니다. 이럴 줄 알았다. 출근하자마자 다들 같은 표정으로 반겨준다. 눈은 평소보다 더 커지고, 입은 타원형이 돼서는 "아!" 혹은 "어!"와 같은 감탄사로 인사를 건넨다. 그리곤 이어지는 질문, 혹시 무슨 일 있어요? 여러 추측이 난무한다. 혹시 심경의 변화가 있던 건 아닌지, 이를테면 실연을 당했다거나 뭐 그런 거. 출근길에 미리 준비해 놓은 답을 꺼낼 차례다. "그냥 갑자기 자르고 싶더라고요." 모든 부서 사람에게 아무런 일도 없었다고, 나는 무사하다며 해명하고 다녔다. 그것도 이틀 내내, 그리고 연차를 써서 오래도록 쉬다 온 동료를 위해 머리를 자른 지 2주가 지난 오늘까지도.
소심한 사람이 감당하기엔 조금은 벅찬 관심이다. 이 정도의 반응이라면 내가 머리를 자른 타당한 이유가 필요해 보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냥 잘랐다던 나의 해명을 곱씹어 봤다. 가만있어 보자, 내가 정말 아무런 이유도 없이 지금까지 정성스레 길러온 머리를 덜컥 잘라버린 것이 맞는 건가. 긴 머리에 싫증이 났고, 거기에 변화를 주고 싶었을 뿐이다. 아, 바로 이거다! 권태감과 변신 욕구, 나에게 뭔 일이 있던 게 맞았다. 온종일 거짓말을 하고 다녔다는 걸 눈치챈 순간이다.
*
민이에게 집으로 잘 돌아왔다는 연락을 한 뒤, 다시 천장을 바라보고 똑바로 누웠다. 천장에 펼쳐진 민무늬 하얀 배경은 머릿속에 있던 잡생각을 끄집어내는 재주가 있다. 아직 저녁밥을 먹기도 전인 이 시점에서 오늘이라는 하루를 곱씹게 만든다. 피스타치오가 콕콕 박힌 마들렌은 말할 것도 없고, 시원한 커피가 고소하니 아주 맛있었다. 게다가 한결같이 친절한 사장님과 나른한풍경까지도, 기대에 어긋나는 것 하나 없이 완벽했다. 다만 예상치 못한 거라면 그 좋은 델 나 혼자 갔다는 거 정도려나.
녹은 막대 아이스크림처럼 방바닥에 찰싹 눌어붙은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나를 무기력하게 만든 범인은 바로 아쉬움이었다. 민이랑 일찍 헤어졌다는 것에서 오는 아쉬움. 그런 마음이라면 온종일 힘이 빠졌던 게 이해가 된다. 그래, 점심만 먹고 헤어지기엔 하루가 너무 길지. 다음엔 민이랑 오래오래 같이 있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다. 밥도 먹고, 식후 커피 한잔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야겠다고. 이왕이면 내가 좋아하는 카페로 가면 더 좋고. 이참에 왜 일찍 집으로 돌아갔냐는 민이의 물음에 다시 대답해야겠다. "너랑 같이 안 가서 재미없었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