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기를 위해 식량을 비축하는 동물과는 달리 여름잠을 앞둔 나는 덜어내기에 바쁘다. 덥고 습해 의욕과 체력이 바닥날 때쯤, 아주 적절한 타이밍에 일주일의 휴가가 주어졌다. 마음 편히 즐기기 위해선 비워야 할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냉장고, 둘째 잡생각.
장기간 집을 비우기 위해 냉장고 털이를 한다.제명을 다하지 못한 채 냉장고 속에서 문드러지는 식재료를 보는 것만큼 자취생에게 있어 속상한 일도 없다. 먼저 상하기 쉬운 것부터 처리한다. 아침 단골 메뉴인 샐러드와 토마토, 가장 유력한 후보다. 평소보다 한 움큼씩 더 그리고 부지런히 먹는다. 생각도 함께 먹어치웠다. 생각이 생각을 낳을 게 뻔하니 싹을 잘라버리는 편이 낫다. 명색이 휴가인데 고민에 짓눌려 1분이라도 낭비하면 억울할 테니까. 여름을 점령한 매미의 울음소리를 한 귀로 듣듯, 문득 떠오른 생각을 미련 없이 흘려보낸다.
이제 여름잠 준비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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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로 한 시간 반이면 도착하는 나고 자란 동네가 이번 휴가의 목적지다. 차로 몇 시간을 달린다거나, 비행기를 타고 멀리 날아가지 않는 만큼 더욱 알차게 쉬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다. 먹고 싶은 것을 먹고, 가고 싶은 곳에 가고,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는데 모든 시간을 할애할 거다.
주말에 가면 사람들로 북적한 맛집과 경치 좋은 카페를 평일이라는 이름하에 여유롭게 즐길 수 있다. 들깨 칼국수 한 그릇과 닭구이 한 판 그리고 아메리카노 한 잔과 초코바나나 타르트에 하루의 절반을 일말의 죄책감 없이 탕진한다. 그다음 그리고 그 다음다음 날도, 또 다른 먹거리에 둘러싸여 흥청망청한 하루를 보냈다. 그래도 상관없다. 다른 건 몰라도 시간만큼은 부자인 한 주이니까. 그 자리엔 그간 못 본 반가운 얼굴도 함께 했다. 일주일만인 가족부터, 반년 혹은 일 년 만에 만나는 친구들까지. 서로의 근황을 업데이트하는 시간이다. 그것도 시간에 쫓기지 않고 아주 여유롭게. 평일 낮의 만남은 조금 색다르다. 햇빛 때문인가, 왠지 모르게 다들 평소보다 안색이 좋아 보인다. 나만 그렇게 느낀 건 아닌 것 같다.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내 눈이 초롱초롱해 보인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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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의 끝자락에 걸쳐있다. 고작 며칠 사이 만에 침침했던 시야가 맑아지고, 찌뿌둥했던 근육이 시원해진 걸로 봐선 푹 쉬었나 보다. 오랜만에 보금자리로 돌아간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더운 공기, 오래도록 집을 비워뒀던 게 체감되는 순간이다. 동면이 끝난 직후의 생명체는 분주하다. 그리고 여름잠에서 막 깨어난 나도 마찬가지다.
7월에 멈춰있던 달력을 8월로 넘기는 걸 시작으로 기지개를 켜본다. 화분에 물을 주고, 밀린 빨래를 하며 가볍게 스트레칭. 그리고 마트에서 장을 보는 걸로 몸을 완전히 일으켜 세운다. 기름진 음식보단 평소에 자주 먹던 익숙한 재료로 골라 담는다. 이를테면 샐러드와 토마토 같은 거로. 그다음엔 비몽사몽인 정신을 깨울 차례다. '잘 쉬었다'라는 생각에 꼬리를 물고 늘어져 본다. 첫째 날은 뭘 했고, 둘째 날은 어딜 갔었는지와 같이 일주일 치 발자취를 따라 천천히 지금 이 순간으로 의식을 데려온다.
익숙한 먹거리로 냉장고를 채우고 여름의 한 조각을 간직하는 것, 휴가가 끝났음을 알리는 명백한 증거다. 어쩌면 그와 동시에 남은 계절을 나기 위한 만반의 준비일 수도 있겠다. 뭐가 됐든 간에, 먹을 음식과 이따금 꺼내볼 수 있는 추억이 넉넉하다는 건 꽤 든든한 일이다. 이 정도의 에너지원이라면 겨울까지는 거뜬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