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표 15,000원. 물가가 흉흉하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댓바람부터 준비해 영화관으로 달려가면 지금보다 절반 이하의 값으로 볼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 이리 가격이 올랐는지 의문이다. 게다가 팝콘과 콜라와 같은 주전부리를 더하다 보면 이만 원은 기본이다.
나와 민이 사이에 암묵적인 규칙 하나가 생겼다. 입소문으로 재미가 보장됐거나, 진작부터 기대하던 작품이 개봉할 경우에만 영화관에서 볼 것. 어쭙잖은 흥미로 매번 지출하기엔 양어깨가 무거워진다.
오랜만에 영화관에 갔다. 큼지막한 화면과 빵빵한 음향으로 보고 싶은 영화가 생긴 탓이다. 영화 위키드가 바로 그 주인공인데, 뮤지컬 기반 영화인지라 음악 비중이 크고 판타지스러운 요소가 많다. 이를 제대로 즐기려면 집에 있는 컴퓨터로는 어림없다.
위키드를 보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는 노래다. 영화 수록곡 중 'I'm Not That Girl'을 오래전부터 좋아했었으니까. 영화 개봉 이전에 뮤지컬 무대에서 먼저 선보였던 곡이다. 비록 뮤지컬을 보지 않아 정확한 줄거리는 몰랐지만, 어딘가 절절한 가사와 멜로디만으로도 18살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예민했던 시절에 즐겨듣는 플레이리스트 목록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민이와의 규칙을 위반하지 않은 좋은 선택이지 않았나 싶다.
K 열 8번과 9번. 아주 훌륭한 자리다. 화면의 정중앙에 위치해 목을 치켜세우지 않아도 되는 영화관 명당이다. 끝에서 세 번째 줄인지라 애쓰지 않아도 상영관 전체가 훤히 보인다. 옆에 앉은 어린아이와 그의 어머니로 보이는 아주머니, 그 앞줄에 혼자 오신 아저씨, 그리고 듬성듬성 머릿수를 채우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이들 외엔 더 이상 드나드는 사람은 없었다. 장소 불문하고 인적이 드문 곳엔 왠지 모를 불안감이 맴돈다. 서서히 주변이 어두워지고 웅장한 멜로디가 흘러나오며 영화의 시작을 알릴 그때, 어딘가 익숙한 언어가 들리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불안감의 실체였다.
서둘러 가방을 뒤적거려 발권받은 표를 꺼냈다. '더빙판', 부인하지 못할 정도로 또박또박 크게도 적혀있다. 가수 아리아나 그란데가 주인공으로 출연한다는 소식에 그녀의 목소리도 꼭 들어보고 싶었는데, 여러모로 기대한 만큼 실망감이 크다.
영화가 시작하든 말든, 애꿎은 종이 쪼가리를 원망하는데 온 신경이 쏠렸다.
*
집에서 8분 정도 걷다 보면 마트 하나가 나온다. 퇴근 후 장 보러 가기 딱 좋은 거리다. 샐러드, 바나나, 아몬드 우유 등 평소에 즐겨 먹는 먹거리를 담다 보면 어느새 장바구니가 두둑해진다. 가까워서 망정이지 꽤 무게감이 있다.
정확히 따지면 갈 땐 8분, 올 땐 10분이다. 길목에 신호등 하나가 있는데 빨간불에서 초록불로 바뀌기까지 1분 30초가 걸린다. 집으로 돌아갈 때의 나는 늘 그 시간을 꽉 채워서 기다린다.
신호등이 초록불을 깜빡거리고 있는 순간 그렇게 얄미워진다. 뛰기엔 촉박하고 그렇다고 걷기엔 아쉽다. 조급한 마음에 무작정 종종걸음으로 걸어보는데, 결국 얼마 못 가 속도를 늦춰버리고 만다. 왼손에 쥔 모래주머니 같은 장바구니가 뛰고자 할 의욕이 꿈틀거리기도 전에 꺾어버린다.
3, 2, 1. 다시 빨간불이다. 장을 봤다 하면 펼쳐지는 일상이라지만, 코앞에서 열차를 놓친 듯한 이 원통함은 당최 익숙해지지 않는다. 이때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신호등을 한껏 노려보는 것. 그리고 신호등이 또 나를 배신했다며 민이에게 일러바치는 것뿐이다.
"그러면 천천히 걸어봐. 속도를 늦춰서 타이밍을 맞추면 되지."
민이는 공감보단 해결책을 건네는 사람이다. 그 덕분에 감정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수월해진다. 동갑내기인 그가 어른스럽게 느껴진 순간이었다.
*
일이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을 때 민이의 말을 떠올리려고 한다. 천천히, 천천히 그리고 또 천천히. 조급하게 고조되는 마음의 속도를 늦춰 숨을 고른 후 다시 느긋하게 바라본다. 엇박자로 시작할 때 비로소 드러나는 무언가가 있기 마련이다.
2시간 40분이 흐르고 영화의 끝을 알리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왔다. 만족스러운 영화일수록 옆 사람과 빨리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충동이 든다. 민이도 마찬가지였는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서로를 쳐다봤고, 한껏 들뜬 억양으로 재밌다는 직관적인 표현을 남발했다. 거기에 주관적인 생각을 살짝 덧붙인다. 사람이 별로 없어서 쾌적하게 잘 봤다고. 앞, 뒤, 옆으로 만석인 영화관에선 절대 느낄 수 없는 쾌적함, 바로 이것이 재미와 더불어 우리가 찾은 무언가인듯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왼손에는 먹거리로 가득한 장바구니가 들려있고, 신호등은 애매하게 초록불을 깜빡댄다. 이번엔 민이의 조언대로 처음부터 천천히 걸어본다. 빨간불로 바뀌기까지 10초 언저리 남은 시간을 임의로 늘리는 방법이다. 내 속도에 맞게 그리고 나만의 타이밍으로.
밤하늘의 구름은 적당히 떠다니고, 달은 어제보다 살이 살짝 더 오른 듯하다. 겨울 내음 가득한 만큼 벌어진 땅과 하늘의 격차를 슬그머니 올려다보다 보면 1분 30초는 금방 흘러간다.
3, 2, 1. "녹색불이 켜졌습니다. 건너가도 좋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신호에 걸릴지 예측 불허 인생이지만, 각자의 타이밍에 맞게 행운을 한 움큼 맞이하기 충분한 속도로 걷고 있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