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89, 90. 이것으로 오늘의 운동도 끝이다.
일주일에 세 번,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게 아니라면 최소한의 운동량을 꼭 채운다. 여기서 말하는 최소란 스쿼트 90개와 엉거주춤한 푸쉬업 18개다. 근육보단 살이 많은 사람이므로 정자세의 푸쉬업은 무리다. 바닥에 무릎을 대고 엇비슷하게나마 시늉이라도 해야지 겨우 가능하다. 이에 비해 스쿼트는 부담이 덜 하다. 다리 사이 간격을 어깨너비보다 살짝 넓게 벌린 채 그저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면 되는 거니까. 스쿼트 90개까지는 무리 없이 가능하다. 스쿼트와 푸쉬업 중 스쿼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건 스쿼트를 더 만만하게 보는 심리적 영향이 없지 않아 있을 거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굳혀진 운동 루틴이 바로 스쿼트 30개와 푸쉬업 6개씩, 총 3세트다.
운동을 할 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안전상의 이유도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정확한 카운팅을 하기 위함이다. 하나를 더할 때 실수로 두 개의 몫을 얹어버리는 건 상관없지만, 덜 셌을 때는 아주 큰 문제가 된다. 그만큼 들여야 할 폼이 많아진다. 할당량 이상으로 할 땐 족히 두 배는 강력해진 중력에 몸을 맡긴 것만 같다. '겨우 한두 개쯤이야'라고 가볍게 넘기기엔 팔다리가 안쓰러울 정도로 파르르 떨려온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평소만큼만 하자고 다짐하게 된다. 내가 정한 나의 한계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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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을 튼 지 고작 5분이 채 되지 않은 사람에 대해 낱낱이 파헤치려 하는 건 지극히 본능적인 행동일 거다. 상대의 표정과 말투 그리고 웃음소리로부터 그에 대한 얄팍한 힌트를 모으고 모아 나름의 결론을 도출해 낸다. 이 사람 이런 사람이구나, 하고.
엠비티아이가 뭐냐는 질문, 어색한 공기를 무마하고 싶을 때 꺼내 드는 카드 중 하나다. 날씨가 어떻냐느니 얘기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가 좋다. 돌아오는 대답은 네 글자. 나 또한 네 글자로 맞받아치면 그다음 대화는 어련히 이어진다.
엠비티아이가 사람을 규정하는 요즘의 방식인 것 같다.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다기보다는 자신의 안목을 은연중에 시험해 보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일교차에 관해 논할 때는 할 수 없던, 일방적인 추측을 넘어 직설적인 추궁을 해보겠다는 의도다. 사람은 늘 겸손해야 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확신이라 일컫는 자만이 초라함으로 뒤엎어지는 건 한순간이니까.
수긍 또는 의문, 서로의 패를 깐 후 맛볼 수 있는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그중 후자인 경우가 열에 아홉인 것 같다. 상대의 엠비티아이 첫머리부터 틀리고 들어가는 게 우리이므로. 자유로운 영혼에게 계획적이지 않냐고 하지를 않나,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이에게는 감정적일 것 같다며 근거 없는 잣대를 들이밀어 버린다. 확신에 찼던 목소리는 난감한 듯 갈라지고, 예리한 척하던 눈썹은 납작 겸손해진다. 당신, 이런 사람이었어?
극도로 내향적인 사람이 바로 나다. 심심할 정도로 평범한 대화를 주고받을 때도 툭하면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가 되고 만다. 마음속 긴장이 피부를 고스란히 뚫고 나오는 거다. 그것도 어쩌다 한 번이 아닌 항상.
이런 나에게 외향적일 줄 알았다며 너스레 떠는 이들이 은근히 많다. '쾌활하다', '활발하다' 등 에너지 넘치는 표현은 어쩐지 낯설다. 횡당보도를 초록불이 아닌 빨간불에 건너는 게 맞다고 우기는 것처럼, 넘으면 안 될 경계선에 침범한 기분이 든다. 손끝에서조차 내향적인 성격이 묻어나는 사람에게 외향적인 면모가 보일 틈이 있을까 싶다가도, 그런 얼토당토않은 추리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다른 사람으로 비치는 일,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먹다 말고 바닥 끝에 묻혀 있던 사과 맛 아이스크림을 발견한 것 같이 짜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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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서 정의 내리는 데 혈안 되어있는 건 오로지 인간뿐일 거다. 현상과 대상에 대해 하나부터 열까지 규정하려 든다. 타인에 대한 것은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이를테면 스스로의 한계까지.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야'라는 생각이 만든 경계선은 일말의 도전 욕구가 얼씬 못 하게 한다. 그런 식으로 자신만의 둥지를 튼다. 조금의 시련조차 허락하지 않는 무균실이자 일종의 안전지대다.
원래의 나는 과연 누구일까. 작은 몸으로부터 새어 나오는 에너지를 주체할 수 없어 온종일 놀이터에서 뛰어놀았고, 갖고 싶은 인형 앞에서 남 부끄러움 없이 세상 떠나가라 울었던 존재. 지금의 나를 수식하는 근력 부족에 내성적인 성격을 내 본질로 삼기엔 적잖이 모순적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의도치 않게 수많은 모순을 만들어낸다. 충분히 하고도 남았던 일에 손사래 치고,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은 지레 겁먹고 시도조차 안 하게 된다. 할 수 없다는 착각은 어떤 매듭보다도 억세서 온몸을 경직되게 만든다. 그렇게 두 손 두 발 놓은 채 살아가는 모순덩어리의 어른이 되어 가고 있다.
생각하고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를 일컬어 사람이라 한다지만, 두 글자에 담기엔 너무나 방대한 존재가 사람인 것 같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그에 따라 시인하기 바쁜 이들이다. 어제와 오늘이, 불과 몇 분 차이로도 마음의 판이 손바닥 뒤집듯 역전하고 또 역전한다.
유연하게 흘러가는 사고 중 무엇을 택할지는 순전히 본인의 몫이라는 것과, 그중에서도 긍정적인 쪽을 붙잡아야 한다는 것쯤은 나이를 먹은 만큼 잘 안다. 하지만 잘 아는 것과 능숙한 것은 엄연히 별개의 문제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괜찮다며 스스로를 다독이는 부적 같은 말은 미꾸라지가 헤엄치듯 머릿속을 빠져나가고, 그 자리에 남은 찌꺼기 같은 생각들이 하루를 좌지우지한다. 수분 하나 없이 텁텁한 땅콩버터가 목구멍을 가득 메듯, 근심과 걱정으로 숨 막히는 일상으로 몰고 간다.
그나마 다행인 건, 위축과 좌절이 기세를 올리기 전에 일말의 자신감이 먼저였다는 것.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건 어려울지라도, 희미하게 깔려 있는 확신으로부터 하나의 가능성을 만들어내기엔 충분할지도 모른다. 타인이 나에게 엿본 능력치만큼만이라도 나 자신을 믿어보기, 이 작은 확신을 첫걸음으로 삼아 스스로 규정해 온 한계의 울타리 너머로 발을 내디뎌 본다. 언제 위축되고 좌절했었냐는 듯, 천연덕스럽게. 이름하여, 한계선 커팅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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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열 번 남짓 팔다리를 더 휘둘렀을 뿐인데 온몸이 후들거린다. 한 치에 오차도 없는 정확한 카운팅의 결과다. 아마 당분간은 울긋불긋한 근육통 때문에 갓 태어난 얼룩말처럼 걸음걸이마저 부자연스러울 거다. 이렇게 몇 번 하다 보면 스쿼트 150개와 정자세 푸쉬업 30개쯤은 거뜬해지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그러다 보면 으쓱한 어깨로 당당하게 세상을 대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근육이 욱신거리는 만큼 한계의 경계가 확장된 듯한 기분이 든다.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으며 느끼는 이 벅참을, 우리는 뿌듯함이라고 부르는 게 아닐까 싶다. 도전하는 어른이 되고 싶기에, 앞으로도 근육통은 계속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