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불이 들어옴과 동시에 일제히 발걸음을 뗀다.
얇은 재킷 안으로 반팔을 숨기고, 분홍 장미가 선명하게 피어올랐던 지난가을. 민이와 함께 걸었던 불분명한 계절 속 풍경도 오늘과 같았다.
색깔부터 형태까지 민주주의 국가답게 가지각색의 신발들이 횡단보도를 가로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갈색 구두는 쇼핑몰로, 검정 샌들은 늦더위에 지쳐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갈구하듯 카페로. 그리고 흰색 운동화 둘은 건너편 공원을 향해 걸어갔다.
나와 민이는 3년 조금 넘도록 흰색 운동화를 고집하는 중이다.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그래왔을지도 모른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서로의 존재를 처음 인식했던 그날에도 우리는 하얀 소재의 신발을 신고 있었다.
운동화의 평균 수명이 대략 1년 정도라고 하면 얼추 계산이 맞아떨어진다. 우리가 정식으로 연인 관계가 된 이후로 각 세 켤레의 신을 장만했다. 흰색, 흰색, 그리고 또 흰색. 총 여섯 켤레의 흰색 운동화다. 이 중 두 켤레는 크기만 다른 완전히 똑같은 신발인데, 이것이 우리가 함께 고른 첫 신발이자 마지막 신발이다.
좋은 신발은 좋은 곳으로 데려다준다는 속설이 있다. 측면에 박힌 수탉 로고가 돋보이는 새하얀 운동화는 깃털이 폴폴 날릴 듯 아웅다웅하는, 마치 닭싸움의 구렁텅이 같은 현실로 우리를 데려갔다. 서로의 자존심을 건 팽팽한 싸움. 네 마음이 내 마음과 같지 않아서, 그래서 네가 틀리고 내가 맞다는 걸 증명해 내기 위해 닭처럼 고개를 꼿꼿이 들었던 거다. 이상하게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다소 엄격해지는 구석이 있다. 사소한 부분 하나까지 서로가 같기를 바라는 욕심 하나 때문일 거다.
신발의 로고가 희끄무레해지고 뒤꿈치와 밑창이 너덜거릴 때쯤, 대략 1년 정도 엎치락뒤치락하고 나서야 그 여정의 끝이 보였던 걸로 기억한다. 승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럴 수도 있지', '네가 그렇다면야'와 같은 말로 비등비등 무마했던 걸로 봐선 무승부로 봐야 하지 않나 싶다. 승패 없는 싸움이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다. 치열하게 옥신각신한 덕분에 단적으로 알게 된 사실 한 가지가 있었으니까.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이구나, 라는 걸.
보고 자란 걸 토대로 자신만의 세상을 구축해 나가는 데 특화된 생물체가 바로 인간일 거다. 보통의 사람인 나와 민이도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무려 30년 세월이 축적된 각자 나름의 세상 속에서 부단히 살아가는 중이다. 아침 식사량, 설거지 타이밍, 침대에 올라갈 때의 옷차림까지. 시시콜콜한 구석마저 서로 다른 두 세상의 만남이다.
01. 한 숟가락이 사람에 따라 편차가 극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민이를 통해 알았다. 민이는 밥 한 숟가락으로 아침 끼니를 충당한다. 아침밥을 거의 안 먹다시피 하는 그에겐 아빠 숟가락으로 밥을 가볍게 한 번 푸는 것이 정량이지만, 비교적 아침을 든든하게 먹는 나에겐 그의 방식대로라면 적어도 세 숟가락은 퍼야 성에 찬다.
02. 모든 일에는 적절한 타이밍이라는 게 있다. 내가 보기엔 최상의 타이밍일지라도 다른 누군가에겐 최악의 타이밍이 될 수도 있고,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설거지하기 가장 좋은 타이밍은 식사를 마친 직후. 쌓여있는 설거짓거리를 처리하는 속도와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시간은 비례하니까. 하지만 민이에게는 이 공식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는 서두르지 않아도 두 다리 쭉 뻗고 쉴 수 있는 사람이다.
03. 집에서 가장 신성한 곳을 꼽자면 단언컨대 침대가 아닐까. 침대에 올라가기 전에 거쳐야 할 나만의 절차가 있다. 깔끔하게 샤워하고, 보송한 잠옷으로 갈아입기. 민이는 늘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초리로 쳐다본다. 퇴근 후 배불리 밥을 먹고, 외출복 상태로 침대의 포근함에 스르륵 기대어 잠드는 날이 다반사인 그이므로.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답게 서로 다른 운동화를 신고 횡단보도를 가로지른다. 두 번째 운동화를 신었을 때도, 그리고 세 번째 운동화를 신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검은색 부메랑을 연상시키는 로고가 포인트인 나이키 운동화를 신은 나. 그리고 별다른 꾸밈없이 깔끔한 데상트 운동화를 신고 있는 민이. 나이키와 데상트, 둘 사이의 공통점이라고는 고작 하얀색이라는 것뿐이다. 다름 아닌 고작 그거라 다행이다. 바탕색이 같아서, 결이 같은 사람이라서.
나와 민이가 서로 일심동체가 되려면 누군가의 희생이 불가피할 거다. 내게서 검정 부메랑을 도려내든, 그걸 민이에게 엉성하게나마 꿰매어 넣든. 어느 쪽이든 간에, 하나의 습성을 온전히 버리고 또 터득하라고 하는 건 다시 태어나라는 일종의 협박일 거다. 만약 성공한다 한들, 잠시 그런 척을 하고 있을 확률이 무지하게 높다.
마음의 격차에 옳고 틀림은 없다. 그저 나는 나답게, 민이는 민이답게 존재하는 편이 자연스러울 거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바로 그 순간처럼. 서로가 다르다는 사실에서 오는 서운함에 툴툴대고 토라질 언정, 그런 모습마저 서로의 예측 범위 안에 있을 테니 괜찮다. 얘가 그래서 저렇고, 쟤가 이래서 그렇다는 걸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는 사이니까. 일심동체까지는 아니더라도 척하면 척하는 그런 사이니까.
나이키와 데상트 운동화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겠다. 어쩌면 닭싸움의 구렁텅이보다도 더한 곳으로, 그러니까 한가을에 반팔을 입고 장미가 활짝 피어났던 것만큼 불확실한 미래로 우리를 데려갈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펼쳐질지, 그때의 우리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조차 모호한 미래로.
지금으로서 분명한 건 내 옆에 있는 사람. 나와는 다른 바로 이 사람과 함께라면 그곳이 어디든 무탈하게 도착할 거라는 믿음이 있다. 존중이라는 이름하에, 지금껏 우리가 그래왔듯, 같은 듯 다른 우리의 모습 그대로 함께 발맞춰 걷다 보면 어디든 간에 도착해 있을 거다. 녹색불이 켜진 횡단보도를 건너듯이. 별일 아니라는 듯 아주 가뿐하게. 그렇게 알 수 없는 미래를 우리만의 오늘로 만들어 가면 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