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목표가 뭐예요?
최근 즐겨 보는 예능에서 한 출연자가 툭 던진 질문. 이것이 바로 고민의 시작이었다. 과연 내가 저 자리에 있었더라면 뭐라고 대답했으려나.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을 얘기하는 것뿐이지만, 인생의 목표를 논하라 하니 거창한 말을 늘어놔야 할 것만 같다. 무엇을 품고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급이, 됨됨이가 판가름 날 것 같은 두려움으로부터 오는 압박감이다.
채찍질도 도움이 될 때가 있다. 등 떠밀리듯 남은 생을 무사히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목표를 정해본다. 그래야 오늘과 내일을, 더 나아가 먼 미래까지 헤쳐 나갈 의지라는 게 솟구칠 테니.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요'라고 할까. 에이, 아니다. 있는 힘껏 다가올 미래를 회피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요'라고 하는 건? 이것도 아니다. 추상적일뿐더러 크게 와닿지도 않는다.
뭐랄까, 잘 짜인 답지 같다고 해야 하나. 형식적이고도 가식적인 대본을 무표정으로 읊조리는 것 같아 영 마음에 안 든다. 머리를 쥐어짜다 못해 결국 머리에 쥐가 나버렸다. 이런 날엔 끝장을 보겠노라 덤벼들기보다는, 생각 회로가 느슨해지기까지 쿨타임을 갖는 편이 낫다. 눈을 감은 채 여섯 일곱 시간 정도 뜸 들이는 걸로 충분하다.
이름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밤사이에 벌어진 다짐이다. 후추와 소금으로 간을 하지 않은 계란 프라이만큼 날 것 그대로의 생각, 인공적 가미 없는 새하얗고 샛노란 진심이다.
이름, 다른 사람과 구별하여 부르는 말. 태어나자마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모로부터 부여받은 석 자. 그 누구도 아닌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고민 끝에 붙여준 고유명사가 아닐까 싶다. 엄마와 아빠가 나를 사랑의 순우리말로 부르는 것 또한 그러한 이유 때문일 거다. 그 덕에 아무개가 아닌 특정한 누구로 거듭났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그 이상은 온전히 내 몫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면, 이름을 더욱 분명하게 남기는 편이 잘 산 인생이라 일컬을 수 있을 거다. 이름의 주인으로서 이름에 힘을 보태본다. 세상에 태어남과 동시에 이름에 대한 선택권은 없더라도, 그가 지닌 의미의 깊이만큼은 내가 하기에 달려있으니.
내 이름의 뜻 곧이곧대로 사랑으로서 그칠 수도, 혹은 더 나아가 사랑을 확장한 무언가로서 존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저 사랑으로 남는다면, 왠지 호호 할머니가 될 때쯤 젊은 날 그 이상으로 뻗어나가지 못했음을 두고두고 후회할 것만 같다.
사랑하다, 사랑을 주다, 사랑을 받다. 사랑이라는 명사로부터 다양한 문장이 파생된다. 문장을 확장하는 건 명사가 아닌 그 외 부수적인 요소 덕분이리라. 어떤 동사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가 되고 만다. 사랑을 넘어 사랑 이상의 존재가 되고 싶은 욕심이 자꾸만 든다. 후회 없이 사랑하고, 아낌없이 사랑을 주고,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사랑을 받는. 그런 한계 없는 사랑이.
이름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는 거요.
인생 목표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향해 내 나름의 답을 마음속으로 삼켜본다. 만약 이 혼잣말이 티브이 너머로 전해진다면, 과연 사람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박수갈채가 쏟아질 리는 없을 테고. 김빠진 콜라처럼 맥이 쏙 빠진 표정을 지을지도 모르겠다. 청자의 반응을 의식해 조금 더 그럴싸하게 포장할 수도 있겠지만, 뭐 어쩌겠나. 이것이 내가 내릴 수 있는 가장 나다운 목표인 것을.
나를 이름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것 같다.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경험하고. 그러다가 사랑에 빠질 무언가를 만나는 순간,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주저 없이 사랑을 주거니 받거니 해야 할 테니.
이름에 걸맞은, 이름값하는 그런 인생을 살아보리라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