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하기, 빼기.
단 두 단어만으로도 인간이 얼마나 빈틈없는 존재인지 알 수 있다. 모든 경우의 수를 대비하려는 이 치밀함. 인간은 여러 반의어를 손에 쥔 채 어떠한 상황에서든 능수능란하게 대응해 낸다.
'순수하다'의 반대말을 생각해 본다. 현실과 이상의 격차 속에서 스스로를 향한 괴리감에 사로잡힌 지금 이 순간을 대표할 바로 그 말을. '불순하다'보다 한층 더 날카롭고 직설적인 표현이 뭐가 있을까. 계산적이다, 계산적이다, 계산적이다... 아무래도 '계산적이다'를 대신할 말은 없는 듯하다.
순수함과 몸집은 반비례한다. 작고 여린 존재가 지닌 동심같이, 순수함은 그들만의 특권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 의사와는 상관없이 세상을 의심하기 시작하고, 매사의 좋고 나쁨을 실시간으로 따지고 드는 어른으로 자라나게 될 테니 순수함은 한철이 맞다. 우리 모두가 더 이상 산타클로스를 믿지 않는, 덩치 큰 계산적인 어른이 되고 만다. 받은 만큼만 돌려주는 정확성. 물질적인 것은 물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도 한없이 깐깐해진다. 이를테면 사랑 같은 것에서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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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친구에게 연락이 올 때요. 그때가 너무너무 행복해요. 그 친구가 보고 싶어서 얼른 학교에 가고 싶어요."
언제 행복하냐는 질문에 수백 통이 넘는 문자가 동시다발적으로 전송됐을 거다. 그중 디제이가 추리고 추린 사연 몇 개가 라디오 너머로 흘러나오는 중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연은 바로 이것. 친구와의 연락이 너무도 아닌 '너무너무' 행복하다는, 나와 정반대의 말을 하는 학생의 고백에 이질감을 느낀다. '뭐, 직장 동료들 나쁘지 않죠. 그런데 회사에 가는 건 끔찍하다고요. 일요일이 영영 끝나지 않으면 좋겠어요'가 솔직한 심정인 사람에게선 도무지 나올 수 없는 문장이니까. 디제이가 유독 이 사연에 오래 머무는 걸 보니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 게 분명하다. 몽글몽글하면서도 복잡 미묘한, 생각이 많아지는 토요일의 오후다.
단지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누군가의 얼굴을 보고 싶어 했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물론 아예 없진 않겠지만, 최소 10년도 더 된 일이다. 숨만 쉬어도 줄줄이 새어나가는 주머니의 사정과 세월이 흐를수록 쇠퇴해 가는 체력을 살피면서 그간 보고 싶은 마음을 잘도 피해 다녔다. 아무런 용건도 없이, 그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자는 명목 하나만으로 밤새 그네를 타고, 아파트 단지를 무작정 걷기에는 나도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버렸다. 하지만 확실히 기억한다. 그때의 느낌을. 무지하게 추운 겨울날,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핫초코를 마시는 것만큼 행복했던 그 느낌. 이것만큼은 무자비하게 흘러가는 시간과 상관없이 변함없는 사실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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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고, 놀고 또 놀면 된다는 이 무성의한 계획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계획보다도 탄탄한 것인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지하철을 기다리며 엿들은 초등학생들의 계획은 실로 완벽했다. 어떤 하루를 보낼지 망설임 없이 내지르는 아이의 목소리에 힘이 가득 실려 있다. 얼마나 서로의 존재를 존중하고 또 좋아하는지를, 그 마음이 깨끗하다 못해 투명하다.
생각에 생각을 더하지 않는 마음. 그런 마음은 분명 파란색일 것이다. 화장실에서 마주친 꼬마가 투명함은 곧 파란색이라고 알려줬으니까.
"엄마, 물은 무슨 색이게?"
세면대와 눈높이가 엇비슷한 여자아이가 수도꼭지 바로 위에 붙어있는 그림을 물끄러미 보더니, 자신과 똑같이 생긴 여자 어른에게 돌발 퀴즈를 낸다.
"당연히 물은 색이 없지."
어른이 정답을 맞힐 리가 없다. 어른과 아이의 세상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만큼 다르게 흘러가니까. 세면대를 온통 파란색으로 칠해놓는다 한들, 어른의 눈엔 파란색이 보이지 않는다.
"땡! 물은 파란색이야."
꼬마의 목소리에 꽁꽁 언 얼음이 깨지듯 두 어른의 눈이 트였다.
우리 집 하얀 털 뭉치 녀석의 눈동자도 파랗다고 할 수 있다. 작은 코로 이곳저곳을 더듬다가 고개를 휙 치켜세울 때, 말랑이의 눈을 통해 세상을 다시 본다. 오늘 하늘이 예뻤구나, 하고. 뭉게구름을 선명하게 담을 만큼 파란 눈망울을 가진 몰티즈다. 어쩌면 말랑이가 나보다 더 많은 걸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놓치고 있는 무언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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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의 나도, 지금의 나도 나다. 달라진 거라곤 고작 나이와 키 정도. 온통 숫자와 관련된 것들뿐이다. 이러나저러나 사람은 사칙연산과 밀접한 삶을 살아간다. 해가 더해질수록 허해지는 마음이라니, 참 아리송한 인생이다.
아이들과 나의 시선에 점점 격차가 벌어진다. 내가 암산이 느린 편이라고 한들, 적어도 이들보단 몇 배는 빠를 거다.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아야 손해를 보지 않을지, 쉼 없이 머리를 굴리는 게 일상이니 당연하다. 돈, 시간,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서까지. 세상에 온갖 정답을 요구하다 보니 어느새 치밀하고도 계산적인 어른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한때 순수했던 사람으로서 일말의 순수함이 남아있을 수도 있다. 욕심, 질투, 의심과 같이 끝없이 더해오던 생각을 도로 덜어내다 보면, 아주 조금은 이전의 시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있는 그대로를 보고, 그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상대가 파란색 사랑을 줬다면, 누가 뭐라 해도 그 사랑을 파란색이라 여기던 순수했던 그때의 시선으로 지금을 마주할 수 있을지도.
순수함의 전제는 용감함일 것이다. 아이들은 높은 곳에서 서슴없이 뛰어내리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매일 같이 저마다의 용맹을 증명해 낸다. 마치 잃을 게 없다는 듯 훨훨 날아다니며 몸을 가만히 두질 못한다. 반면 어른들은 잃을 게 많다. 돈과 시간은 말할 것도 없고, 자존심같이 자질구레한 것들까지도. 어른들이 자꾸 몸을 사리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용감하지 못한 어른이기에, 또 다른 방식으로 순수함을 표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다.'
그럼에도 할 수밖에 없는 유의미한 동작들로.
수십 년 동안 누적해 온 욕심과 욕망의 판을 뒤흔들 용기가 나에게도 있을지는 직접 해봐야 알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