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6시, 인정사정없이 울려대는 알람 소리에 눈을 뜬다. 눈과 귀를 닫고 나 몰라라 잘 수도 있지만, 그래봤자 고작 5분이다. 만에 하나 듣지 못할까 봐 맞춰 놓은 알람이 무려 아홉 개. 거기에 하나를 더해 자그마치 열 개다.
아침마다 찹쌀떡을 외치는 아저씨. 정확히 말하면 '찹쌀떠-억'이다. 길게 늘어지는 발음이 어감을 한층 더 쫀득하게 한다. 어디에서부터 소리가 흘러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요 근방인 건 확실하다. 후덥지근해질수록 아저씨의 목청이 날로 좋아지는 건 순전히 기분 탓이려나. 아무튼, 그 덕에 밀려있던 알람들은 모조리 쓸모를 잃는다.
이 소리에 잠이 깰 날이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 일주일 뒤면 이곳을 떠나게 될 테니까. 작별을 앞에 두고 아쉬움이 발목을 붙잡아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한다. 한마디로 정이 든 거다. 얼굴도 모르는 아무개에게. 정확히 말하면 아무개가 있는 이 작은 동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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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동네가 낯선 이유는 새로운 풍경이 아닌 옆집 아주머니처럼 그 흔한 연고조차 없기 때문일 거다. 생판 모르는 존재들 사이에서 오는 일종의 소외감. 나 이외의 것들이 모두 제자리인 듯 보인다. 가로등과 가로수, 그리고 길가 위의 비둘기마저도. 4년 전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도저히 내가 낄 자리라고는 없어 보이는, 차디찬 아스팔트를 닮은 도시였다.
적응의 동물이자 사회적 동물이 바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들지 않았다. 미로 같던 동네는 손바닥 안이 되고, 아는 사람이라 칭할 수 있는 존재가 하나둘 늘어났다. 그렇게 이곳에 있을 타당한 연고를 찾아냈다.
능소화가 길게 늘어진 주택가에서도 하나 찾았다. 남편은 커피를 내리고, 아내는 빵을 굽는 한적한 카페. 부부 사장님이 지키고 있는 이곳 주위로 어느덧 두 번째 능소화가 피어났다. 꽃이 지고 다시 피기까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소한 이야기를 일궈내기 충분했다. 이곳의 커피와 마들렌을 좋아하게 됐고, 더 이상 사장님과 손님이 아닌 서로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됐다. 한 마디로, 애정하는 관계가 생긴 거다.
생일은 언제나 설렌다. 특히 좋아하는 존재의 탄생일이라면 당사자보다 더 들뜨는 법이다. 카페의 1주년은 나에게도 유의미하다. 집과 회사를 제외하고 가장 많이 들락거린 곳. 그간의 발자취를 스스로 기념하는 날이기도 했으니까. 앞으로도 오래오래, 가능하면 평생 이 자리를 지켜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담기엔 꽃 한 송이만 한 게 없다.
이에 질세라 바삐 움직이는 사랑스러운 부부. 손수 제작한 종이 뽑기 판을 눈앞에 들이민다. 꾹꾹 눌러쓴 'Happy 1st birthday!!'라는 글자가 그들의 들뜬 어깨를 쏙 닮았다. 그 아래로 엄지손톱만 한 종이가 대략 수십 개쯤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마치 각 손님에게 부치는 편지라도 되는 듯 단정하게.
1등부터 5등까지 있고, 꽝은 없다는 말을 듣자마자 겁 없이 한 장 골랐다. 어쩌면 공평성을 위한 사장님들의 철저하면서도 무해한 감시 덕에 서둘러 고른 걸지도 모르겠지만. 이유가 어찌 됐든, 기분이 좋다. 생일자를 향해 터트리는 폭죽처럼 시원하게 종이를 펼쳤다.
에잇, 미니 초코바 당첨. 늘 뽑기에 약한 사람인지라 별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괜히 아쉽다. 그래도 5등이 어디냐며 만족해하는 행복한 꼴찌다.
한 시간쯤 흘렀을까. 미니 초코바를 손에 쥔 채 카페를 나오면서 잊지 않고 한 번 더 축하 인사를 건넸다. 마음 같아선 백번이고 더 축하해주고 싶지만, 진심이 가벼워 보이지 않도록 두 번으로 말을 아끼기로 한다.
"다음에 부담 없이 또 오세요", 라며 나의 진부한 인사를 근사하게 받아주는 부부 사장님이다. 작은 크기의 초코바만큼 부담을 덜어주는, 담백하면서도 달콤한 인사다.
역시 생일은 모두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기묘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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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있는 곳에 몸이 간다는 말은 사실이다. 아침이든 저녁이든, 하루에 한 번 이상은 꼭 창밖을 내다봤다. 이 집이 좋았던 이유는 침대도 식탁도 아닌, 다름 아닌 바로 이 커다란 창이었다. 건물 사이에 갇히지 않아 흘러가는 하늘을 고스란히 담을 수 있는 하나의 액자. 이 창문 너머로 7평 남짓의 작은 방은 곧 세상이 됐다. 능소화처럼 일몰의 끝자락에 붉게 물든 구름과, 그 뒤를 찬란하게 밝히는 밤하늘의 불꽃, 아침을 깨우는 찹쌀떡 아저씨의 목소리까지. 동네의 밤낮을 또렷하게 보여줬다.
이곳을 떠나기 전에 구름도, 불꽃도, 찹쌀떡 아저씨도 하나도 빠짐없이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절묘한 타이밍과 행운에 조금 의미를 부여해 보자면, 동네가 건넨 굿바이 인사가 아니었을까 싶다.
창 너머에 있을 부부 사장님을 향해 손을 흔들어본다. 다음에 또 오겠다는 마음을 담아. 부담 없이 오라는 그들의 말을 명분 삼아, 있는 힘껏. 아주 떠나는 건 아니니 언제든 돌아올 수 있다. 커피와 마들렌이 그리워질 때, 부부 사장님의 다정함이 보고 싶을 때, 이 동네의 구석구석이 궁금해질 때면 얼마든지. 낯선 타지 생활의 첫 시작을 함께 해준, 무사히 둥지를 틀게 해 준 고마운 이들을 위해 조금은 부지런해져야 할 것 같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듯, 찹쌀떡 아저씨의 반의반만큼이라도.
정든 나의 동네, 다음에 또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