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brunch
타임이라 외칠 수 있는 용기
휴식이 필요한 타이밍
by
가담
May 31. 2023
주말에 산책을 하면서
동네 놀이터를 지나가는데,
어떤 꼬마 애가
아파트에 울릴 정도로 크게
"타임!"이라고 외친다.
생각해 보니
초등학생 때는 놀이터에서
탈출 게임이나 얼음땡을
할 때는 물론이고,
일상 속에서도
필요하다고 느낄 때면
별 고민 없이
'타임'이라는 단어를
툭 던지곤 했다.
아주 가끔이긴 했지만
학원에 가기보다는
집에서 짱구를 보고 싶을 때
배가 아프다거나
머리가 아프다는 둥,
최대한 목소리에
힘을 빼고 말하며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나만의 시간을 확보하곤 했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꾀병이 아니라
정말 몸이 안 좋더라도
계획에 없던 연차가
속수무책으로 까이는 게 싫어서
미련하다 싶을 정도
꾸욱 참게 된다.
5월 첫째 주 주말이
지나가는 새벽에
온몸이 덥지만 추운듯한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월요일이 돌아왔다는
압박감 때문에 악몽을 꿔서
식은땀이 났겠거니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출근했는데,
평소 같았으면
커피와 달달구리로
이미 돌아왔어야 할 정신이
오후가 되어도 여전히 몽롱했다.
완벽한 타이밍에
좋은 곳에 놀러 가려고
아껴뒀던 연차를
엄한데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애써 참아보려 했지만,
머리에 폭신한 튜브를 낀 것처럼
둔하고 멍한 상태가 지속되어
고민 끝에 결국 반차를 써버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코로나 키트로 검사를 해보니
선명하게 두 줄이 나왔고,
차곡차곡 모아뒀던 연차를
반강제적으로 빼앗기고 나서야
일주일 동안 마음 편히
멈춤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자취방에서
2년 정도 같이 살고 있는
식물 하나가 있는데,
나름 잘 키워보겠다고
이삼주에 한 번씩
꾸준히 물을 준 게
오히려 독이 됐나 보다.
다 스며들기도 전에
끊임없이 밀려오는 물에
숨이 막혔었는지,
흐물흐물한 흙 속에
응애라는 작고 하얀 벌레가 생겼다.
아무래도
나도, 식물 친구도
휴식이 필요한
타이밍이었나 보다.
화분을 올려놓은 창가로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오는 동안,
직장인으로 지내며
놓쳐왔던 오전 시간을
마음 가는 대로 채워본다.
햇빛이 창을 넘어올 때쯤
느긋하게 눈을 뜨고,
아침밥을 먹으며
천천히 책도 읽어 보고,
후식으로 커피를 마시며
좋아하는 글도 쓰고,
자기 전에는 힐링 되는
영화 한 편을 본다.
흔들리는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을
혼자 조용히 쐬어보니,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이었는지
조금 더 명확해지는 것 같다.
'타임'이나 '얼음'을 외쳐
모두가 스쳐 지나가는 동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때,
비로소 바지에 묻어있던
먼지를 털어내고
헐떡거리는 숨을 돌려보며
누군가 예고 없이
땡! 치고 가더라도
가뿐히 다시 달릴 수 있도록
재정비의 시간을 가져본다.
바람을 쐰지 일주일째,
조금씩 몸이 근질근질하고
화분 속 흙이
제법 뽀송해진 걸 보니
슬슬 움직여야 할 때인가 보다.
또다시 어제가 오늘인지
오늘이 내일인지도 모를 만큼
그저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내겠지만,
잠시나마 가진
멈춤의 시간 덕분에
습기 없는 화분 속 흙처럼
단단해진 마음 사이로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을
평소보다 더 뿌리 깊게
흡수할 수 있을 것 같다.
성실히 살아가다가
이웃집 꼬마 아이의
"타임!"이라는 말이
문득 부러워질 때쯤,
어릴 때처럼
그리고 조금은 더 당당히
오로지 나를 위해
타임이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를 내어 봐야겠다.
keyword
그림에세이
에세이
휴식
8
댓글
2
댓글
2
댓글 더보기
브런치에 로그인하고 댓글을 입력해보세요!
가담
직업
에세이스트
담담하게 그리고 느리지만 천천히, 훗날 무르익을 일상을 기록합니다.
구독자
87
제안하기
구독
작가의 이전글
아메리카노와 얼음 같은 관계
마음 그림자
작가의 다음글